작전명 폼페이 최후의 날
“내가 자네한테 진 신세가 있어서 이쯤 해둘 테니까 잘 들어. 당장 이 근처에서 꺼져. 고향으로 돌아가든지 너하고 똑같은 인간들하고 어울려, 여긴 네가 올 곳이 아니야!”
그때 살롱 안에 들어갈 때마다 정신을 미혹시키던 장미향이 유성준의 코를 자극했다. 곧이어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손목을 잡는다.
“내려놓으세요. 선생님이 상대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본이였다.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인지 회색 투피스에 망사가 달린 모자를 썼다. 화장이 짙지 않아서 장연수도 쉽게 본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유성준이 손을 내리자 장연수는 두 손으로 목을 감싸고 호들갑스럽게 숨을 몰아쉬었다.
“도대체 누가 남의 마누라인지 말씀 좀 해보시지요?”
“누, 누구긴 누구야? 다, 당신이지!”
“내가 왜 남의 마누라인가요?”
“나랑 혼례를 올렸으니 내 마누라 아닌가?”
본이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제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장연수가 본이 앞에 똑바로 섰다. 경성에 와서 날마다 술을 마셔댄 탓에 그러잖아도 뾰족한 턱이 더욱 뾰족하게 말랐다.
“우리 부모님도 당신을 아직 며느리로 생각하셔서 데려오라 하셨소. 내, 저 자식과 관련된 일은 다 덮을 터이니 같이 갑시다.”
장연수가 본이의 양 손목을 덥석 잡았다. 본이는 그런 장연수가 너무 어이없어서 손목을 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당신도 아주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군!”
장연수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자 그제야 정신이 든 본이가 손에 들고 있던 클러치 백으로 장연수의 가슴을 밀쳤다.
“이보세요. 장연수 씨! 정신 좀 차리세요. 저 안에는 경무국 직원들도 있답니다. 당장 불러내서 혼쭐을 내기 전에 당장 돌아가시지요.”
본이의 백에 박힌 뾰족한 장식이 장연수의 가슴을 자꾸 찔렀다. 장연수는 손으로 백을 걷어 치고 소리를 질렀다.
“니들, 나한테 이렇게 함부로 하고서도 무사할 줄 알아? 유성준, 잘 들어. 네가 나한테 맡겼던 가방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째 수상하단 말이야.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니까 각오해라. 니들 둘 다 죽었어!”
본이는 그런 장연수의 뒷모습을 보면서 망연자실 서 있었다. 저런 인간과 평생을 살지 않고 쫓겨난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도 아닌 유성준 앞에서 남의 마누라라는 소리를 들은 것이 참을 수 없는 수치로 여겨졌다.
본이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푹 수그리고 있었다. 입술을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입안으로 핏물이 스며들었다. 살롱 안에서 이본느로 유성준을 상대하던 기개는 다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그냥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부끄럽지만 그에게 위로받고 싶었다.
유성준이 본이의 손목을 잡더니 갑시다, 하는 말 한마디만 했다. 그런데 그가 가는 방향이 살롱 쪽이 아니었다. 성큼성큼 걷는 유성준의 발걸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본이가 종종거리며 끌려갔다.
“어, 어디를 가시는 거예요?”
유성준은 대답하지 않고 앞장서서 걷기만 했다. 그가 멈추어 선 곳은 창경궁 앞이었다. 종로에 자리를 잡고 살롱 문을 열었지만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남들은 창경궁에서 코끼리를 보았네, 바나나 나무를 보았네 하면서 떠들지만 본이는 미처 가볼 여유를 찾지 못했다.
올겨울에는 유독 눈이 많이 내렸다. 어떤 사람은 순종 임금이 돌아가시고 나서 사람들의 마음에 원한이 서려 눈도 이렇게 많이 오는 것이라고 했다.
유성준의 빠른 걸음을 따라가려니 구두를 신은 발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보다 못한 유성준이 가까이 오더니 본이의 팔을 자신의 팔에 끼워 넣었다. 이제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돌담길을 걷는 연인처럼 보였다.
그가 발길을 옮긴 곳은 창경궁이 아니라 창덕궁이었다. 지난해까지 순종 임금이 지내던 창덕궁은 함양문 너머 창경궁과 달리 궁궐 모습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제 임금님도 없는 세상, 신기한 동물들과 열대의 나무가 진열된 창경궁은 궁이 아니라 원이 되었다. 눈이 쌓인 창덕궁 안에는 가끔 날아오르는 까투리 말고는 움직임 없이 고즈넉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