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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태서문예신보

작전명 폼페이 최후의 날

by 은예진

의열단 수뇌부에서는 결국 살롱을 비밀 정보 교환의 장소로 이용할 것을 결정지었다. 그 사실을 통고받은 유성준은 이본느를 통해 전달되는 내용은 암호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본느가 내용을 알게 되면 만에 하나 그녀가 체포될 시에 비밀 유지가 어렵다는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다.


유성준은 되도록이면 이본느가 하나라도 모르는 것이 조금이나마 신변을 보호하는 수단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살롱에서 이본느를 통해 전달되는 사항은 암호를 만들어 의열단원들이 알아듣되 이본느는 그 내용을 모르도록 했다. 그 암호문을 만든 것은 유성준이었다.


태서 명작 시리즈의 일 번부터 십이 번까지는 월을 상징했다. 그러니까 태서명작 오 번인 『햄릿』을 읽어보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오월인 셈이다. 날짜는 신조사의 명작 시리즈 일 번부터 삼십일 번으로 삼았다.


태서 명작의 『햄릿』과, 신조사의 『나나』를 읽었다고 하면 오월 십구 일이 되는 셈이다. 태서 명작과 신조사 명작은 이본느가 자주 앉는 의자의 뒤쪽 책꽂이에 꽂혀 있었다. 의열단의 행동 단원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작은 규모로 움직였다.


세포조직과 조직 사이에 소통을 위해 이본느가 필요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작전의 날짜가 잡혔다면 『춘향전』을 언급하고, 기다려야 한다는 의사 표현은 『숙영낭자전』을 언급하기로 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박씨전』을 긴급회의 주청은 『홍길동전』 등으로 정했다.


이러한 언급이 일반적인 대화와 혼동되지 않기 위해 이러한 사항이 전달될 때는 이본느의 머리에 파란 리본을 두르도록 했다.


유성준이 만든 암호문이 마음에 썩 들었는지 김석중 선생은 신문에 연재하던 독서 칼럼 코너인 ‘나는 이런 책을 읽었다’에서도 이 전달 방식을 사용했다. 의열단원들은 선생이 거론하는 책 제목만 가지고도 의열단 수뇌부에서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순종 인산일에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도 하고, 밀정 습격을 비롯한 작은 사건들은 몇 번 일으켰지만 좀 더 중요인물에 대한 공격이 부족했다.


의열단 단장 김은성은 평소에 우리가 노리는 곳은 동경과 경성이다. 우선 조선 총독을 계속해서 대여섯 명을 죽이면 그 후계자 되려는 자가 없을 것이고 동경 시민이 놀랄 만한 사건을 한 해에 두어 번 일으키면 우리의 독립 문제는 그들 사이에서 제창될 것이다. 결국은 일본 국민 스스로 조선 통치를 포기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총독을 공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성준은 접근조차 어려운 총독이 민영식의 양부인 혼마치 생일 축하연에 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 메모를 휘 갈렸다. 태서문예 『폼페이 최후의 날』, 신조사 『신곡』, 『춘향전』, 『박씨전』이었다.


어떤 식으로 거사를 진행해야 할지 골몰한 채 살롱 밖으로 나가는 유성준의 앞을 검은 그림자가 가로막아 섰다. 깜짝 놀란 유성준이 고개를 들자 장연수가 팔짱을 낀 채 살롱 입구에 서 있었다. 유성준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더니 고리에 걸려 있는 살롱 표지판을 손으로 쳤다. 고리에 녹이 났는지 부드럽지 못한 소리가 났다.


“이본느의 살롱이라 이거 아주 웃기는구먼. 그런데 말이야, 내가 요 근처에서 시월이 년이 들어가는 것을 봤지. 이게 웬일이야. 이천에서 마누라 몸종을 하던 년이 왜 여기서 돌아다니는 거지? 아, 물론 내가 자네 뒷조사를 좀 했지. 뭐 나도 자네만큼 부자는 아니지만 우리 노인네들도 내가 쓰고 싶은 돈을 못 쓰게 할 양반들은 아니니까. 자네나 자네 부류들이 여기 모인다던데. 그곳 여주인이 이본느라나 뭐라나. 처음에는 그냥 여기서 자네를 좀 만나 볼까 했더니. 보이가 나를 막데. 여기는 그냥 술 마시러 오는 곳이 아니라고. 나 참 별 그지 같은 것들이 다 사람을 차별해요. 그런데 말이야 거기서 시월이 년이 갑자기 쌩하고 지나가네.”


유성준은 주먹에 힘줄이 툭툭 불거져 올라오도록 힘을 잔뜩 주었다. 그가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 복싱 대표였다는 것을 장연수는 미처 기억하지 못했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너, 이본이랑 무슨 사이냐? 여기 봐라! 이본느 이거 이본이잖아. 그걸 알 만한 사람은 나나 너밖에 없지 아마?”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겠네. 볼일 있으면 들어가서 보고 그렇지 않으면 돌아가게. 난 바쁜 사람이야.”


“뭘 하시느라 그렇게 바쁠까? 남의 마누라랑 붙어먹으려고 그러나?”


유성준은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쉬면서 주먹에 힘을 빼기 위해 애를 썼다.


“아, 얼굴 쓰라려. 나는 자네가 나를 바닥에 쑤셔 박은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나름대로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리고 내린 결론이지! 그 촌년과 유성준이 뭐가 있다! 역시 나는 계산이 빨라!”


유성준은 주먹을 치켜들었다가 그대로 장연수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유성준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데다 몸 자체가 빈약한 장연수는 그대로 밀려서 벽에 붙었다. 장연수는 발버둥을 치면서 이 손 놓지 못하느냐고 외쳤다. 하지만 그 외침은 유성준의 손 때문에 목구멍을 통과하기 어려웠다. 그저 컥컥거리는 소리로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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