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명 폼페이 최후의 날
묵묵히 걷기만 하던 유성준의 발길이 멈춘 곳은 창덕궁 후원에 있는 부용지였다. 본이는 얼어붙은 연못의 풍경 앞에서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적요한 그곳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얼어붙은 부용지 위에도, 연못을 바라보고 있는 부용정의 지붕 위에도,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 위에도 하얀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숨이 막히는 광경이라는 것이 아마도 이런 풍경일 것이다. 본이는 자기도 모르게 유성준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열서너 살 때였을 거요. 이곳을 처음 왔을 때는 봄이었지. 이곳은 새싹이 돋는 봄은 봄대로, 실록이 우거진 여름은 여름대로, 단풍 물든 가을은 가을대로 아름답다는 말을 많이 들었소. 그런데 겨울 풍경은 어떤지 못 들어봤거든. 겨울에도 한 번 와봐야지 생각했었는데 오늘 드디어 왔네요.”
눈앞의 아름다움에 취한 본이가 어깨를 떨자 깜짝 놀란 유성준이 추운 모양이라며 그의 코트를 벗어 어깨에 걸쳐주었다.
본이는 그의 코트에서 나는 그윽한 냄새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묵은 서책 냄새와 비슷하지만 쾌쾌하지 않고 으늑한 느낌이 든다. 장옷에서 나던 바로 그 냄새. 그리움 가득한 냄새.
“저는 역시 자격이 없겠지요.”
본이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유성준을 올려다보았다. 그 말을 들은 유성준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본이는 역시 맞는구나 싶어 더는 그의 눈을 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였다.
“저도 알아요. 제가 선생님을 사랑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요. 어찌 감히 저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이 선생님 같은 분을…….”
순간 유성준은 본이를 제 품으로 와락 끌어당겼다. 누르고 눌렀던 감정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밤 이후로 내가 얼마나 당신을 그리워했는지 알기나 아느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녀의 양쪽 뺨을 감싸 쥐기만 했다.
부용정 뒤에서 갑자기 고라니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본이가 손으로 유성준의 목을 휘어 감고 바싹 달라붙었다. 고라니는 두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구경하겠다는 자세로 둥그런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더니 재미없다는 듯 재빨리 주합루 쪽으로 달렸다.
주합루 앞에서 멈춘 고라니의 뒤꽁무니가 실룩거렸다. 그 모양을 보고 있던 본이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유성준은 본이의 가슴이 자신을 누르고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제 그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본이가 제 손이 아직도 유성준의 목을 감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내리려는 찰나 모든 것이 멈추는 듯했다.
그의 손이 본이의 허리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입술은 잠시 멈칫 거리는 듯싶었으나 본이가 긴 눈썹을 파르르 떨며 감아 버리자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유성준의 입술은 본이의 입술을 통해 영혼까지 빨아들일 기세였다. 입술만으로 성에 차지 않은 그는 보드라운 귓불에서 갸름한 목덜미까지 탐했다. 그리고 점점 내려가 마침내 블라우스의 단추 앞에서 그의 입술이 멈추었다. 본이의 허리가 뒤로 휘면서 유성준이 걸쳐주었던 코트가 바닥에 떨어졌다.
유성준이 솟아오르는 열망을 주체하지 못해 가슴 깊숙이 얼굴을 묻으려는 순간 본이의 손이 가로막고 들어왔다. 본이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립스틱이 뭉개진 얼굴, 느슨해진 블라우스 앞섶을 여미고 서 있는 그녀는 눈빛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흩어지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지난번처럼 그렇게 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시겠지요? 저는 선생님에게 뭔가요? 저도 알아요. 제가 감히 선생님께 이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요. 하지만 저는 선생님을, 저는 선생님을…….”
본이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차마 그에게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차갑게 언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유성준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장연수로부터 모멸을 당한 본이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살롱의 삶이 전부인 그녀에게 잠시 위안의 시간을 주고 싶었는데 도리어 상처만 주게 되었다. 거사를 결심한 사람이 어떻게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본이의 눈을 피하면서 다가가 바닥에 떨어진 코트를 주워들었다. 그 코트를 본이의 어깨에 둘러 주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미안합니다.”
본이는 유성준의 몸을 밀어젖히고 뒤돌아서서 잰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더는 울고 싶지 않아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흘러넘치는 눈물을 감당할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발목이 꺾인다고 생각했을 때 몸은 이미 바닥으로 나동그라진 뒤였다. 스타킹이 찢어지고 무릎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급하게 달려온 유성준이 상처를 보더니 소리를 질렀다.
“눈길입니다. 그 구두로 여길 뛰다시피 걷다니 정신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다리라도 부러지면 어쩌려고 이랬어요? 무릎 괜찮아요?”
본이는 화를 내는 그가 밉고 넘어진 자신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 채 가로 저었다. 유성준은 손수건을 꺼내 무릎의 피를 닦고 묶어준다. 본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고개를 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유성준이 뭐하냐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깜짝 놀라 앞을 보니 그의 등이 본이의 앞에 들어와 있었다.
“업혀요.”
“걸을 수 있어요. 놔두세요.”
본이가 유성준의 등을 밀어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 화부터 내고 보는 성격인거 알지요. 더 밀면 또 화냅니다. 빨리 업혀요.”
본이는 하는 수 없이 그의 등에 엎여 목을 끌어안았다. 시월이는 걸핏하면 본이보고 헛똑똑이라고 타박했었다. 책을 통해서 아는 지식은 많았지만 그 지식을 현실에서 적용할 때 너무 순진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유성준의 말과 행동은 서로 정반대이니 본이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살롱의 안채로 들어간 본이를 보고 시월이가 호들갑을 떨었다. 시월이는 우리 아씨 또 무슨 사고를 친 것이냐며 구급상자를 열어젖혔다. 약솜에 소독약을 묻혀들더니 본이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씨, 입술이…….”
본이는 화들짝 놀라 입술을 손으로 가렸다. 시월이가 어떻게 자신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알아버렸나 싶어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무 일도 아니야.”
“아무 일도 아니긴 그게 어떻게 아무 일도 아니에요?”
도대체 시월이가 어떻게 눈치를 챈 것인지 몰라 쩔쩔매는 본이의 손을 걷어낸 시월이가 본이의 입술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넘어졌기에 입술에도 이렇게 피가 났데요.”
본이는 어이가 없어 자기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을 웃었다. 손거울을 든 본이는 부어오른 입술을 만지작거리면서 마음먹었다. 다음에 유성준을 만나면 당당하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