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명 폼페이 최후의 날
당신이 아무리 거부해도 제가 자격이 없어도 어쩔 수 없이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러한 제 마음을 받아 주실 수 없다면 꼭 알고라도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을 소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대가 사랑을 지킬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제 마음 알고 계셔야 할 것입니다.
무릎에 약을 바른 시월이가 손수건을 들고 일어섰다. 그걸 본 본이가 손수건을 달라고 하자 시월이는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 한다.
“빨아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 수건은 주인한테 돌아가기는 다 틀렸네요.”
본이의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을 놓치지 않은 시월이가 우리 아씨 감기 기운이 있나 왜 이렇게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얼굴이 빨개지나, 하며 달아났다.
본이와 헤어진 유성준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집으로 갔다. 더는 자신을 내버려 둬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이 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영식과 그 양아버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방법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지난번에 만난 그 아가씨와 결혼하겠습니다.”
“네가 위약금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다. 드디어 결혼하겠다는 소리를 하게. 내가 공증 서류 등기로 보낸 것을 받은 모양이지?”
“아닙니다. 아직 못 받았습니다. 하지만 결혼하겠습니다. 대신 날짜를 정확하게 3월 9일로 했으면 합니다.”
“3월 9일?”
“네, 그리고 총독부 손님을 최대한 많이 초대해 주십시오.”
“그건 걱정하지 마라. 네가 초대하지 말라고 해도 초대할 거니까. 결혼하고 나면 바로 우리 은행에서 근무 시작해라. 내가 비록 네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때도 잦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는 우리 집 장손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아들 중에 너만 한 배짱과 머리를 가진 놈이 없어. 결혼만 하면 너도 정신 차릴 것으로 생각한다.”
좋아하는 아버지를 보자 유성준은 마음 한편에 죄송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혐오스러운 자본가라고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였다. 그가 아들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것처럼 공증서류를 보내며 협박하지만 아들의 한마디에 순진할 정도로 좋아하는 아버지이다.
아들의 의중에는 관심 없이 자기 뜻이 관철된 것에만 마냥 좋아하는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예민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차를 내려놓던 어머니는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성준아, 나는 지난번에 병원에 왔던 그 아가씨가 걸린다.”
자고 가겠다며 방으로 들어가는 성준의 뒤통수에 대고 어머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네 마음을 안다고 생각한다. 내가 비록 너를 낳지는 않았지만 너를 처음 품에 안는 순간 내 마음에 탯줄 하나가 너를 향해 이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너는 나를 속이기 어려워.”
“어머니,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그 사람이랑 저 병실에서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않았는데 뭘 안다고 그러세요. 우리 어머니 하여간 넘겨짚는데 선수라니까!”
“그래. 나는 네 마음을 넘겨짚는데 선수다. 선수니까 아는 거다. 그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본 네 눈빛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가 시키니까 네 선 자리를 주선하기는 했지만 네 마음이 어디 있는지 알기 때문에 나는 이 결혼이 정말 성사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생각으로 결혼을 결심한 거니?”
유성준은 눈썹이 꿈틀거릴 정도로 얼굴에 힘을 주었다. 혹시라도 선수라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결심이 들키기라도 할까 봐 말이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고 선수인 우리 어머니도 실수하실 때가 있네요. 아니에요.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저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결혼해서 대일 은행 차기 회장이 될 생각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렇게 하는 걸 어머니도 바라는 바잖아요.”
“그래, 나도 바라는 바이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무언가가 개운치 못하고 두려워. 네가 너무 적극적인 것이 두려워.”
“걱정하지 마시라니까요. 하여튼 우리 어머니 노파심을 알아주어야 한다니까.”
성준은 설레발을 치면서 자리에 들었다. 어머니가 곁에서 떠나지 않은 것을 알기에 일부러 코를 고는 시늉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