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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푸른 리본의 날

암호명 폼페이 최수의 날

by 은예진

홍정순은 본이에게 푸른 리본이 잘 어울린다며 책을 좀 빌려 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사흘 뒤에 돌려줄 테니 『폼페이 최후의 날』과 『신곡』, 『춘향전』, 『박씨전』을 빌려 가겠다고 했다.


본이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흘 뒤 살롱에는 의열단 세포 조직원들의 당수들이 모두 모였다. 처음 보는 청년도 있었고 자주 나오는 청년도 있었다. 본이는 푸른색 실크 원피스에 푸른 리본을 매고 나타났다.


그녀에게서는 여느 때와 다른 느낌이 났다. 오후의 햇살을 즐기는 나른한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가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의 눈빛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입술이 마르는 듯 자주 혀로 입술을 축였다. 푸른 리본의 시간이 끝나면 창덕궁에서 차마 하지 못한 말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문학 토론은 몇몇 사람들만 진지하게 참여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좀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또는 본이의 말을 들을 생각은 하지 않고 본이의 허리나 가슴 쪽으로 시선을 흘끔거리는 남자들만 많았다. 그럼에도 책 제목이 등장할 때면 청년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글라우쿠스와 연인 이오네의 이야기는 베아트리체로 넘어갔다. 베아트리체와 춘향이 중 누가 더 문학적인가에 대해 묻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글라우쿠스와 이오네를 구한 것은 장님 여자 노예 나디아였고 이시백의 가족들을 구한 것은 박씨 부인입니다. 이 도령보다야 춘향이가 뛰어나고 신곡은 결국 베아트리체에 대한 이야기인데 왜 우리 조선에서는 여자들이 아직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사는 거냐고 하자 청년들이 함성과 함께 손뼉을 쳤다.


일어서서 이야기하던 본이가 자리에 앉자 유성준이 일어나서 봉투 하나씩을 돌리기 시작했다. 본이의 시선이 그를 따라다녔지만 그는 본이의 눈길을 피하기만 했다.

“여러분 제가 3월 9일에 결혼식을 합니다. 다들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이제 드디어 노총각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유성준이 자신의 결혼을 알리는 목소리는 경쾌했다. 특히 민영식은 유성준의 결혼이 자신의 결혼보다 더 기쁜 일인 양 소란스럽게 축하의 말을 전했다. 누군가는 들개처럼 자유롭게 살던 유성준이 드디어 목에 단단한 족쇄를 채우는 것이냐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제 결혼해야지 그럼 언제까지 그렇게 천둥벌거숭이처럼 살 거냐며 격려해 주었다.


유성준의 결혼 상대자인 여성은 미쓰코시 오복점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조선인 대표의 딸이라고 했다. 다들 대일 은행 사주의 자식다운 결혼이라며 부러움 섞인 어조로 떠들었다. 그 자리에서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은 오직 본이 밖에 없었다.


본이의 시선이 사람들 틈에 섞인 유성준을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이게 정말 당신의 진심이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본이의 시선이 집요할수록 유성준의 회피 또한 끈질겼다.


결국 본이가 고개를 돌렸다. 본이는 남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녀의 미끈한 다리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사람들의 관심이 본이에게 쏠렸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남자들을 홀릴만한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유 선생님의 결혼을 축하하며 제가 오늘 샴페인 한 잔씩을 돌리겠습니다.”


병원에서 유철호 회장이 결혼 이야기를 할 때 그 돈이 살롱에 들어간 돈일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부자지간에 거래한 돈에 관한 약속이 정말 진지한 약속일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 예상과 달리 유성준은 지금 결혼 날짜를 공표했다.


결국 이 살롱을 유성준과 맞바꾼 것이란 말인가? 본이는 혼란스러웠지만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아직도 유성준의 뜨거운 입술이 닿았던 자신의 입술에 귓불에 느낌이 생생한데 이게 무슨 날벼락같은 일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누군가 본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화들짝 놀란 본이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 민영식이 서 있었다.


“이본느, 저기 할 말이 있는데요.”

“무슨 일이신가요?”


“3월 2일에 저희 아버지 혼마치 경무국장님의 생일 축하연이 있습니다. 그때 제 파트너로 동반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원래 유성준 저 친구한테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했었는데 저 친구가 자기 결혼 때문인지 영 이본느에게 말해 볼 생각을 하지 않네요.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본이는 눈앞에 있는 민영식에게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그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 본이의 시선을 고집스럽게 피하던 유성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민영식과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과 마주친 순간 본이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해 버렸다.


“저야 혼마치 국장님의 생일 축하연에 참석할 수 있다면 영광이지요.”


“와! 이본느 정말이지요? 정말이지요? 마음 변하기 없습니다.”


민영식이 살롱 안을 펄쩍거리며 뛰어다녔다. 그가 소리를 지르며 환호하자 누군가 결혼하는 게 유성준이야? 민영식이야? 하며 중얼거렸다. 홍정순은 유성준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지만 본이는 보지 못했다. 샴페인을 손에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틈을 헤치고 홍정순이 본이를 향해 다가왔다.


본이는 계속해서 그 자리를 지탱할 기운이 없었다. 무너지려는 몸을 간신히 지탱해 가며 안채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홍정순이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이본느, 민영식이 생일 축하연에 같이 가자고 했지요?”

“네, 그래서 가기로 했어요.”

“저기 부탁이 있어요.”

“네?”

“민영식에게 내 피아노 연주를 아버지 생일 축하 선물로 주는 것이 어떤가 한번 권해봐 주세요. 저도 그 축하연에 꼭 참석하고 싶습니다.”


“오늘 제가 이야기한 폼페이 최후의 날과 혼마치 생일 축하연이 관련이 있는 것이군요. 그렇지요?”


“그건 이본느가 모르는 것이 좋아요. 우리는 당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되도록이면 정보를 제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저를 바보 취급하시는 거겠지요.”

“설마 누가 이본느를 바보 취급하겠습니까?”

“누구긴 누군가요. 당신들이지요.”

“이본느!”


들떠서 야단스럽게 흥분한 민영식은 지금 이본느가 하자고 하면 못할 것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이본느는 혼마치의 생일 축하연이 3월 2일이고 유성준의 갑작스러운 결혼식이 9일 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둘 사이에 무언가 연관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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