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명 폼페이 최후의 날
홍정순이 동경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그의 동생은 삼일 만세 운동 현장에서 붙잡혀 총살을 당했다. 동생은 단순한 죽음에 그치지 않고 시신까지 능멸당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장터 길목에 총에 맞은 동생의 시신이 전시되었다. 시신에서는 썩은 물이 흘러내리고 구더기가 득실거릴 때까지 방치되었다.
동생이 살아서 친분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그의 시신 앞에서 고개를 돌리고 코를 틀어막았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못하고 그의 시신을 혐오해야 했다. 홍정순이 급하게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뒤였다.
어머니는 동생의 시신 앞에서 정신은 놓아버렸다고 했다.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게 하는 경찰들에게 분노한 어머니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경찰서로 뛰어 들어갔다. 경찰서 안에서 미쳐 날뛰던 어머니는 사흘 뒤에 산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전하는 매제에게 홍정순은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당신은 무엇을 한 거냐는 질책을 하고 싶었다. 매제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작 분노해야 할 일제 대신 매제를 탓하고 싶은 자신의 옹졸함에 화가 났다. 그 길로 고향을 떠나 다시는 그곳을 입에도 올리지 않았다.
몇 날 며칠을 피아노 건반만 두드렸다. 건반을 부숴버릴 듯 두드리다 마침내 멈춘 순간 홍정순은 다른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는 뜨거운 용암을 감추고 있는 휴화산처럼 분노를 가슴속 깊이 가라앉혔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신분세탁에 나섰다.
몇몇 골치 아픈 일들이 있었지만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홍정순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아는 사람이 있는 일본을 피해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되도록 자신을 몰라보게 외양을 꾸며가면서 마음속에 칼을 갈았다. 그는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가는 날 조선에서 제일 높은 일본인을 죽여 가족의 복수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조선에 들어와 독주회까지 열었지만 과거의 그를 안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김석중 선생은 그의 가슴속에 타오르는 불길을 알아보았다. 선생은 그를 몇 번 보지도 않고 자네 그러다 그 불에 스스로 타버리고 말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홍정순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렸다. 선생은 홍정순이 가슴에 품은 불길에 자신을 모두 태워 재가 되지 말고, 불길을 싸안고 오래 견딘 숯이 되라고 하셨다.
유성준은 차마 홍정순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지 못하고 애꿎은 벽만 치며 언성을 높였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본느를 그토록 위험한 일에 자꾸만 끌어들이는 것입니까? 우리끼리 충분히 해나갈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끼리 할 수 있지 하지만 더 어렵지. 나는 이본느 아니라 어떤 사람이라도 필요하면 모두 끌어들일 것이네. 자네처럼 대단한 아버지를 배경에 두고 뜬구름 잡는 이념으로 무장한 아나키스트하고 나는 다르다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민족의 이름으로 내 가족의 복수를 해야 할 사람이야. 그러니까 앞으로 그따위 도련님 우는 소리를 내지 말라고. 알았나?”
“당신들은 매번 이런 식이야! 불리할 때마다 우리 이념을 조롱하고 의열단만 민족을 걱정하는 것처럼 잘난 척해!”
“그게 사실이니까.”
이번에는 유성준이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주먹보다 홍정순의 발이 더 빨랐다. 걷어차기에 나가떨어진 유성준이 씨근덕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피아니스트야. 절대 주먹을 쓰지 않지. 그리고 말이야 지금 자네는 사랑에 눈이 멀어 이미 판단력을 상실한 상황이야. 평소의 자네라면 내 발차기에 나가떨어지지 않았을 거야. 나보다 더 빨리 움직였을 거라고. 그런 마음이라면 자네는 이번 폼페이 최후의 날에서 빠지는 것이 좋을 거야!”
유성준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홍정순의 말에 반박할 수 없다면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