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명 폼페이 최후의 날
본이는 민영식에게 사이토 총독이 클래식 애호가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양아버지 생일 축하연에 클래식 연주를 선물로 드리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홍정순의 연주 정도면 사이토총독이나 혼마치 국장이 만족할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민영식이 홍정순의 축하 연주에 관해 이야기하자 혼마치는 환영의 뜻을 밝혔다. 그러잖아도 언젠가 사석에서 홍정순이 조선인이라는 것이 아깝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총독에 대해 약간의 반감을 품은 혼마치는 총독이 지나치게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며 투덜거렸다. 경찰인 혼마치가 보기에 총독의 취미는 계집애 같은 유약함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폼페이 최후의 날’이 밝았다. 민영식은 유성준과 이본느 사이에 심상치 않은 감정들이 오고 가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사랑과 재채기는 감출 수 없는 법이라고 하는데 살롱에 매일 드나드는 민영식이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민영식뿐만 아니라 살롱에 자주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본느의 시선과 유성준의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들을 목격하고는 했다. 그런데 유성준이 다음 주에 결혼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민영식은 유성준의 결혼과 동시에 자신은 이혼하겠다고 결심했다. 이본느가 상심한 시기를 재빨리 잡아채야 할 것 같았다. 유성준은 민영식에게 있어서 여러모로 고마운 인물이었다.
조선 철도호텔 연회장 앞에는 혼마치 가족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일본에서 찍은 가족사진과 이곳에서 양아들인 민영식까지 포함된 가족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총독부 직원들과 같이 찍은 사진도 있었다. 평생을 경찰조직에서 보낸 그의 얼굴은 빈틈없는 딱딱함이 배어 있었다.
협상이나 정치적인 문제를 경무국 일에 관여시키는 것을 싫어해서 능구렁이 같은 사이토 총독과는 서로 맞지 않는 업무 스타일을 가졌다. 사이토는 하나를 내주고 두 개를 얻어내려 하지만 혼마치는 얻을 것이 있어도 처리할 일은 곧이곧대로 처리해야 하는 사람이다.
민영식은 유성준에게 조선인들은 참여하기 어려운 축하연이라고 허풍 떨었지만 식장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 중에는 유명한 친일 인사들이 여러 명 눈에 띄었다. 생각보다 검문이 삼엄했다. 호텔 입구에서는 초대장과 신원 확인 정도를 했지만 연회장 앞에서는 주머니 속까지 확인했다.
홍정순은 남부 베이비라는 별명이 붙은 일본 장교들이 흔히 사용하는 권총을 피아노 속에 숨겨 놓았다. 하지만 유성준은 직접 들고 들어가야 하는데 식장 안에 가지고 들어갈 방법이 없어 보였다.
양말에 끼워 놓았는데 조선인들을 들여보낼 때는 양말 확인은 기본이었다. 백작 작위를 받은 송병준이 바짓단을 치켜들고 양말 속을 확인받고 있었다. 당황한 유성준이 뒤로 빠졌다.
유성준보다 뒤늦게 들어온 민영식은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본이는 삼엄한 검문이 유성준을 주춤거리게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본이는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뾰족한 구두 굽으로 유성준의 발을 슬쩍 밟았다.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자 잠시 후 유성준이 따라왔다. 주변에 눈치를 살피던 본이가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재빨리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유성준이 놀란 눈으로 본이를 보았다.
“제 머리 보이지요. 올림머리 가발에 커다란 모자를 썼잖아요. 가발 속에 총을 넣을 수 있어요. 사인을 주시면 제가 고개를 숙여 모자를 떨어트릴 테니 제 가발에서 총을 꺼내세요.”
유성준은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홍정순에게 그렇게 화를 냈지만 결국 본이를 더 위험한 지경에 끌어들이는 것은 자신이 되었다. 유성준은 발목에서 재빨리 베이비 남부를 꺼내 본이의 손에 들려주었다.
총은 작아서 본이의 손바닥 안에도 쏙 들어갔다. 본이는 여자 화장실 안에 들어가서 가발을 좀 더 부풀려 머리카락 속에 총을 집어넣고 모양을 잡았다. 챙이 넓고 화려한 모자는 총 모양이 드러나지 않게 잘 감추어 주었다.
흰색 제복을 입은 혼마치와 금빛 화려한 기모노를 입은 그의 아내가 가운데 테이블에 앉았다. 게이샤들이 분위기를 돋우느라 샤미센 연주를 하고 있었다. 게이샤들이 있는 자리에 가면 흔히 들을 수 있던 츠가루 정가라부시라는 곡이다.
들어오는 사람들은 제일 먼저 혼마치를 찾아가 생일 축하 인사를 했다. 어떤 사람들은 서양식 옷을 입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일본 전통 의상을 입었다. 그렇게 동서가 섞인 의상 탓인지 피아노를 등 뒤에 두고 샤미센을 연주하고 있는 게이샤들의 모습이 별반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혼마치의 옆자리는 총독을 위해서 비워져 있었다. 민영식은 본이와 함께 혼마치의 가족석에 안내되고 유성준과 홍정순은 뒷자리에 안내되었다. 유성준은 본이와 거리를 두게 된 것이 불안해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본이를 흘끔거렸다.
본이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유성준의 새끼손가락을 슬쩍 잡아주고 지나갔다. 그 순간 유성준은 묘하게 안도감을 느꼈다. 언젠가 홍정순이 이본느가 칼리오페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칼리오페는 영감만 주는 것이 아니라 수호천사가 되어 주기도 하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