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명 폼페이 최후의 날
본이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혼자서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유성준은 본이에게 다음 주로 예정된 결혼에 대해서 입도 벌린 적 없었다. 그뿐 아니라 폼페이 최후의 날 이 지난 뒤에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려 준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이는 마음에 준비하고 대책을 세우고 있었다.
“시월아, 김 군 좀 불러봐라.”
“어디 가시게요?”
“아니 뭐 좀 상의할 게 있어서 그런다. 네가 알 일이 아니다.”
“아씨, 설마 이상한 생각하시는 거 아니지요?”
“이상한 생각이라니?”
“김 군하고 저는 아무 사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혹시 오해하시는 것 아닌가 해서요.”
본이는 빨개진 시월이의 얼굴을 보고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네가 딱 그 꼴이구나. 걱정하지 마라. 내가 부탁할 것이 있어서 부르는 것이니 말이다.”
본이는 김 군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하는 부탁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더 위험할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인력거를 끌고 뛰어다니는 김 군이 방에 들어오자 땀 냄새와 바람 냄새가 훅하고 코를 찔렀다. 그 냄새만으로도 본이는 김 군을 신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땀 냄새는 말로만 떠벌리는 자들은 결코 닿을 수 없는 어떤 진실함을 가진다.
“부르셨습니까? 아씨.”
“김 군이 아마 학생이라고 했지요?”
“네. 가족도 없이 혼자되어서 학교에 다니려다 보니 이렇게 인력거를 끌고 있습니다.”
“김 군에게 내가 아주 중요한 부탁을 할 것이 하나 있는데…….”
본이가 말을 꺼내자 김 군의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진지해졌다. 믿고 일을 맡겨주는 것만 해도 고맙다는 김 군의 말을 본이는 진심으로 믿었다. 상의를 마친 본이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만약 말이에요.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시월이를 부탁해요. 김 군이라면 시월이를 부탁해도 될 것 같아요.”
김 군도 시월이와 마찬가지로 볼 뿐만 아니라 귀까지 빨개져서 걱정하지 마시라고 큰소리를 쳤다. 본이는 그런 김 군의 힘찬 목소리가 듣기 좋아 함박웃음을 지었다.
김 군이 돌아가고 시월이를 다시 불렀다.
“시월아, 이 봉투에는 이 건물 문서를 포함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이 들어있다. 혹시 말이다.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거든 네가 알아서 처분해서 사용하도록 해라.”
“아씨, 이게 또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래요? 똑바로 말씀해 주세요. 저는 아씨가 제대로 이야기해 줄 때까지 이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할 거구먼요. 빨리 말하세요. 무슨 일이에요?”
“나도 몰라!”
“잉? 모르는 일인데 왜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돈이며 건물 문서를 저한테 주신데요?”
“몰라서, 나도 몰라서 그러는 거야. 그러니 제발 이번만은 가만히 있어.”
“아씨, 유 선생님 때문이지요? 그렇지요? 하여간 처음 만날 때부터 뭔가 불길했다니까. 난 몰라요. 난 끝까지 아씨 따라다닐 거예요. 절대 아씨 없는 세상에 이 돈으로 살지 않을 거예요. 아씨가 죽으면 그냥 나도 따라 죽을 거니까 이 돈 따위 주지 마세요.”
“시월아, 제발 한 번이라도 내 말 좀 들어봐라!”
본이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시월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도리어 더 큰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들을 말이어야 듣지요! 앞으로 그런 소리 절대 하지 마세요.”
본이는 시월이의 야단에 목이 메었다. 사랑하는 남자도, 피를 나눈 가족도 주지 못하는 위로를 시월이에게서 받았다. 그래서 더더욱 시월이라도 지켜주고 싶었다.
잠자리에 누운 본이는 낮에 본 신문 기사가 어른거렸다. 유성준과 그의 신부 될 여자가 미쓰코시 백화점 건설 현장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미쓰코시 오복점은 승격해서 곧 일본에서와 같은 백화점이 된다고 했다. 상업 자본과 금융 자본의 결합이라는 설명과 함께 두 사람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여자는 일본 미쓰코시 백화점 본사에서 직접 경영 수업까지 받고 온 신여성이라고 했다. 본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여자였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 배우고 싶은 거 다 배우고, 갖고 싶은 거 다 가진 여자의 모습에서는 눈부신 광채가 나는 것만 같았다.
본이는 유성준이 혼마치 생일 축하연에 무사히 참석하고 이 여자와 결혼하기를 바라야 하는지 아니면 무언가 일이 벌어져 쫓겨 다니게 되거나 더 무서운 일이 일어나 결혼 같은 것은 못하게 되길 바라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