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명 폼페이 최후의 날
문이 열리고 제복을 입은 사이토 총독이 앞뒤로 수행원을 세운 채 들어왔다. 총독의 제복에 달린 훈장들이 유난히 번쩍거렸다.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는 연주되지 못했다. 홍정순의 손가락은 피아노 건반 대신 사이토를 향한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사이토가 거꾸러졌다. 비명이 들리고 혼마치가 벌떡 일어나 뛰어들었다. 유성준도 권총을 꺼내 들어 혼마치를 향해 두 발, 그를 부축하는 민영식을 향해 한 발을 쏘고 곧이어 두 발을 더 쏘았다. 그 사이 사이토 총독을 수행하던 수행원들이 마구잡이로 총을 쏘아댔다.
홍정순이 피를 토하며 피아노 앞으로 거꾸러졌다. 유성준에게도 총알이 퍼부어졌다. 그는 허벅지가 찢어지는 통증을 느꼈다. 총알은 한 발밖에 남지 않아서 무장한 여러 명의 경찰을 총으로 상대할 수는 없었다.
유성준이 유리창 쪽으로 달려가자 총알이 그쪽으로 쏟아졌다. 유성준이 노린 일이었다. 총알에 맞은 연회장의 유리창이 와장창 깨졌다. 유리 파편이 여기저기로 튀고 고개를 숙이고 엎드린 사람들이 다시 한번 비명을 질렀다.
유성준은 도움닫기를 하는 것처럼 힘껏 달려 유리창을 넘어갔다. 다 깨지지 않은 유리 조각들이 그의 몸을 찔렀다.
유성준과 홍정순의 거사에 의열단은 도주로를 확보해 주기로 했었다. 이날 의열단은 사이토 총독과 혼마치가 공격당하는 혼란스러운 틈을 노려 헌병대 무기고를 터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다. 의열단 처지에서 보자면 두 사람의 거사는 일종의 시선 분산을 위한 쇼가 되는 것이다.
의열단 단장은 아나키스트인 유성준을 위해 굳이 인력을 분산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어차피 총독이 참석한 생일축하연에서 거사를 벌인 그들이 살아서 그곳을 빠져나오리라고 여기 지도 않았다.
유성준이 유리창 밖으로 튀어나왔을 때 그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경찰들이 먼저 한 무리 달려왔다. 유성준은 총을 들고 그들을 향해 겨누었다. 경찰들도 총을 뽑아 들기는 했지만 쏘기보다는 체포하려는 듯 총을 버리고 투항하라는 말을 했다.
식장 안에서처럼 무조건 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유성준은 뒷걸음질을 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조선 철도호텔의 정원에는 엄폐물로 사용할 만한 돌조각들이 군데군데 서 있었다. 첫 번째 돌조각을 향해 뛰어가자 총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성준은 무사히 돌조각 뒤에 숨었다. 그가 두리번거리며 도주를 책임져 주기로 했던 의열단의 모습을 찾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당황한 유성준이 뒷걸음질을 치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불붙은 화염병을 건네주었다. 그는 경찰들을 향해 화염병을 집어던졌다. 경찰들이 흩어지는 사이 화염병을 들려주었던 손이 그를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허벅지에 피가 흐르는 유성준을 이끄는 청년의 몸놀림은 힘차고 날랬다. 그가 달리는 방향은 유성준이 생각한 도주로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청년의 손에 자신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청년이 도착한 곳에는 한 무리의 인력거가 서 있었다. 청년은 유성준을 인력거에 태우고 달리기 시작했다.
인력거 안에는 유성준이 다리를 가릴 치마와 기생용 양산이 준비되어 있었다. 유성준은 재빨리 치마를 걸치고 양산으로 상체를 덮었다. 인력거들이 사방에서 그를 포위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숨을 돌리고 보니 옆구리에서도 통증이 느껴졌다. 손을 더듬어 보니 유리에 찔린 상처가 한 뼘은 되게 파여 있었다. 피가 흘러 인력거의 의자를 적셨다.
유성준은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본이를 생각하며 버티고 있었다. 그 자리에 남아 있는 본이가 부디 무사하기를 빌었다. 경찰들은 여기저기 뛰어다녔지만 텅 빈 인력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는 풍경에 대해서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인력거를 끌고 달리던 김 군은 이본느의 예측대로 들어맞은 것에 대해 신기하다는 생각 했다. 이본느는 의열단에서 홍정순과 유성준을 절대 구하려 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누구도 총독에게 총을 쏘고 그 자리를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본느는 유성준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아무도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아도 자신만은 믿어야 유성준이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력거꾼인 김 군과 함께 도주 경로를 만들었다.
홍정순이 자신들의 도주를 위해 의열단이 병력을 투입할 것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의 얼굴에는 의열단의 말을 진실로 믿는 것은 아니라는 느낌이 전해졌다.
김 군이 조선철도호텔 근처를 모두 뒤져보았지만 의열단의 낌새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홍정순이나 유성준이 그 자리에서 즉사할 것으로 생각했다.
김 군은 소향의 집이 있는 다방골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자신이 큰 공을 세웠다는 생각에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시월이 그것이 자신을 매번 무시했지만 이번만은 인정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으로 생각했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본이는 유성준이 유리창을 깨고 뛰쳐나가는 것을 보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야 피아노 앞에 고꾸라져 있는 홍정순의 부릅뜬 눈이 보였다. 본이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걱정하기 전에 죄책감이 휘몰아쳐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자신이 유성준을 살릴 걱정에 매달려 있을 때 홍정순의 죽음을 걱정해 본 적이 없었다.
본이가 거사를 계획하는 그들의 안위를 걱정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실제로 유성준의 죽음이 걱정된 것이지 홍정순이 아니었다.
그녀가 살기를 기원했던 사람은 유리창 밖으로 뛰어 나갔지만 그렇게 빌어 준 이 없는 홍정순은 피범벅이 되어 쓰러져있다. 그가 죽은 것이 어쩐지 자신의 탓만 같아서 목구멍 안에서 울컥울컥 울음이 밀고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