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명 폼페이 최후의 날
혼마치 집안의 어린아이들이 꽃을 바치고 생일 축하 시를 낭송했다. 사이토 총독이 오면 피아노 연주를 하고 음식이 나오기로 계획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총독이 오지 않고 있었다. 혼마치가 불쾌한 얼굴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기다리다 못한 혼마치가 손짓을 하자 케이크가 들어왔다.
사이토 총독 없이 케이크 자르기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연주하던 홍정순이 사이토를 맡고, 유성준이 혼마치를 맡기로 했다. 만약 사이토가 오지 않으면 유성준 혼자 혼마치를 맡고 홍정순은 유성준을 비호해주기로 했다. 그런데 혼마치는 사이토가 오지 않으면 연주 자체를 듣지 않을 것만 같았다. 홍정순이 권총을 꺼낼 수 없는 것이다.
홍정순이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계속해서 손을 쥐었다 폈다 안절부절못했다. 총을 본이에게 맡겨 놓은 유성준 또한 마찬가지였다. 혼마치와 사이토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자리는 흔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불안하게 눈을 굴리고 있는 사이 요란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혼마치가 케이크에 촛불을 껐다.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본이가 민영식에게 귓속말한다. 민영식이 일어나 혼마치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혼마치는 귀찮은 듯 피아노를 뒤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본이가 일어서서 홍정순과 유성준의 사이로 걸어왔다.
본이가 고개를 숙여 유성준에게 다가가면서 슬쩍 모자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모자를 줍기 위해 바닥에 엎드린 본이가 머리를 테이블 밑으로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녀의 올려 감은 머리카락 속에서 총 끝이 살짝 보였다. 유성준은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떨리는 손을 간신히 뻗어 총을 소매 속에 넣었다. 자신 혼자만 관련된 일이라면 이토록 떨리지 않았을 것이다. 자칫하면 본이의 목숨이 위태로웠다. 유성준은 소매 속으로 들어간 총의 차가운 느낌에 안도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홍정순이 피아노 앞으로 다가가자 젊은 축들 사이에서 요란한 박수 소리가 나왔다. 그 박수에 혼마치가 기분 좋은지 민영식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홍정순은 젊은 일본인들 사이에 가장 인기 좋은 피아니스트였다.
홍정순이 고른 첫 번째 레퍼토리는 우류우 시게류의 진행곡에 있는 <더 뷰티풀 리버>였다. 당당한 진행곡의 리듬은 생일 축하자리에 썩 잘 어울렸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일본인들이라면 다 좋아하는 음악을 첫 번째 곡으로 선택하자 분위기를 띄우는 데 성공했다. 어떤 노인이 흥을 못 이겨 피아노 선율에 맞추어 손뼉까지 쳤다.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홍정순의 연주에 집중하는 분위기였다. 그 사이 유성준은 소매 속에 있던 총을 주머니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첫 번째 연주가 끝나자 홍정순이 마이크를 잡고 다음 곡을 설명했다. 아름다운 강을 연주했으니 이번에는 강물 흐르듯 아름다운 곡으로 유명한 <쇼팽 왈츠 7번>을 연주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곡은 오늘 생신을 맞이하신 혼마치 경무국장님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모님에게 바치겠습니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혼마치 부인 얼굴에 화사한 웃음이 번졌다. 여자는 혼마치보다 스무 살은 어려 보였다. 소문에 의하면 첫 번째 부인이 병을 얻어 누워 있을 때 그녀가 죽기도 전에 얻은 아내라고 했다. 어찌 되었든 첫 번째 아내는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죽었다고 한다.
왈츠가 연주되는 동안 누군가 다급하게 들어와 혼마치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혼마치가 긴장한 표정으로 일어나고 다들 어수선하게 움직였다. 총독이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홍정순은 연주가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피아노에 기대서서 다음 곡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곡은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입니다. 제가 이 곡을 선택한 것은 사이토 총독님이 가장 좋아하는 피아노 연주곡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홍정순과 문을 번갈아 보면서 총독이 들어 올 때를 기다렸다. 민영식이 갑자기 홍정순에게 다가와 총독님이 들어오시면 처음부터 다시 연주하라고 시켰다. 홍정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분위기는 흥분되어 어수선했고 이제 모든 시선은 문을 향해 쏠렸다. 그 틈에 홍정순의 손이 슬쩍 피아노 뚜껑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짐노페디는 고대 스파르타의 연중행사인 제전의 이름입니다. 이 제전에서는 스파르타를 지키는 용맹한 젊은이들이 군무를 추면서 신을 찬양합니다. 저는 이 음악을 오늘 생신을 맞이하신 혼마치 경무국장님과 이 자리를 빛내주기 위해 찾아오신 사이토 총독님께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