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사람들
경성제국대학 세미나실에서 나온 초로의 남자가 주머니에서 계피 과자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피곤한 강의가 끝나면 그는 계피 과자를 먹어야 기운을 차리는 습관이 있었다. 일정이 빠듯한 학회 활동을 이겨내려면 계피 과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조선에 들어올 때 이것부터 챙겼다.
식민지 조선의 상업 자본 육성을 위한 세미나는 실제로 어떻게 하면 조선의 경제를 좀 더 치밀하게 지배할 수 있을까를 연구해 보자는 것이다. 아이자와 교수는 아무리 와세다 대학교수 신분이 철저한 비밀 보장에 중요한 도구가 되어 준다고 해도 이따위 연구를 하고 발표해야 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학 측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 들어간 아이자와 교수는 일찌감치 취침 중이라는 푯말을 걸어놓고 슬며시 빠져나왔다. 그를 눈여겨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본에서 세 명의 교수들과 같이 왔는데 그들은 별로 친분이 없어서인지 세미나가 끝나면 각자 개인행동을 한다.
한 사람은 조선의 기생이 최고라는 소리를 들었다며 기생들을 찾아다니고 다른 한 명은 조선의 미술품에 관심이 많았다. 돌아갈 때는 가방을 채워갈 거라며 커다란 빈 가방을 하나 들고 왔다.
아이자와 교수는 종이에 적힌 주소를 인력거꾼에게 보여주었다. 인력거꾼은 예이 소리와 함께 달렸다. 경성의 밤거리는 동경과는 다른 묘한 생동감이 있었다. 일본의 중소 도시 규모도 되지 않는 초라한 도시인데도 이상한 활력과 힘이 느껴졌다. 이건 유성준을 앞에 두고 있을 때 느꼈던 기운과 아주 유사한 것이다.
정돈되지 않은 에너지는 어디로 튈지 몰라서 불안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강력한 느낌이었다. 아이자와 교수는 이 기운을 제대로 쓴다면 조선은 훗날 막강한 나라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왕이면 그 나라가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동등한 연합 정부를 가진 나라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런 희망 때문에 지금 아이자와 교수는 의열단의 정신적 지주인 김석중 선생을 만나기 위해 가는 것이다.
태화관이라는 간판 앞에 인력거가 멈추었다. 평소에 요릿집을 다녀보지 않은 아이자와 교수는 문을 열자마자 들리는 노랫소리에 멈칫했다. 술병을 든 보이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교태를 부리는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조선말과 일본말이 섞여서 들리고 어디선가는 거친 목소리의 욕설이 들리기도 했다.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아이자와 교수를 본 지배인인 달려와 찾으시는 분이 있는지를 묻는다. 아이자와 교수는 연락받은 노란 편지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지배인은 편지를 보더니 냉큼 그를 매화실로 안내한다. 방은 이 층 귀퉁이에 있어서 비교적 방음이 잘되는 편이었다.
빈 방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카펫이 들썩이고 바닥이 열리면서 계단이 드러났다. 깜짝 놀란 아이자와 교수가 일어서자 그 계단으로 김석중 선생이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삼엄한 감시를 받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천만의 말씀입니다.”
두 사람이 손을 마주 잡고 힘을 주었다. 김석중 선생은 일본에도 이런 지식인이 있다는 것에 감동한 표정이었다. 아이자와 교수는 키가 크고 덩치가 큰 우락부락한 외모임에도 온화한 표정을 가진 김석중 선생에게서 다시 한번 조선이 가진 그 특유의 에너지를 느꼈다.
“우리 흑우회에서는 유성준 군을 만주로 보낼 계획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어서 빨리 접촉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만주에서 잠시 머물며 활동하다가 올 구월에 광동지역에서 열릴 무정부주의자 동방연맹의 조선 대표로 참석시킬 예정이니 협조 부탁합니다.”
“유 군과 연락이 닿은 지 저희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조심스러워서 지금 머물고 있는 곳에 사람을 붙여 놓기는 했지만 안전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만주로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유 군이 망설이는 눈치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망설인단 말입니까?”
“유 군 입장에서는 사이토 총독의 이이제이 수에 놀아났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이 끝장을 봐야겠다는 마음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다른 문제도 있기는 한 것 같은데…….”
김석중 선생이 말끝을 흐렸다. 그도 아끼는 본이 때문에 유성준이 망설이고 있다는 말을 어쩐지 하고 싶지 않았다. 유성준은 의열단 단원이 아닌 흑우회 소속이었고 흑우회는 민족보다는 이념이 우선인 곳 아닌가. 하지만 유성준은 엄연한 같은 조선 민족이었다. 김석중 선생 입장에서 아이자와 교수가 유 군에 대해 좋지 못한 생각을 가질 수 있는 말은 가급적 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