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열애설을 내자고요?”
너무 놀란 서아의 눈은 흰자위 끝에 붉은 실핏줄이 보일 만큼 벌어졌다. 민 기자가 침착한 목소리로 자신이 설명하겠다며 서아를 진정시켰다.
“두 사람이 같은 집에 살고 있고 서아 씨가 가로수길 천사라는 이미지를 얻었습니다. 이런 이미지는 요즘 침체기를 겪고 있는 강우혁 씨가 재도약을 하는데도 꽤 좋은 이슈 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침체기라는 말에 강우혁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민 기자를 노려보았다.
“서아 씨는 절대 연기자 지망생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우혁 씨는 천사 같은 여자친구를 얻는 것. 둘 모두에게 윈윈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특종을 내는 팩트 뉴스가 가장 좋겠지.”
우혁이 쏘아붙이자 민 기자는 양손을 모으고 굽신 거리는 시늉을 했다. 당황한 장 대표가 이게 무슨 소리냐고 사납게 되물었다.
“어디까지나 의견입니다. 제가 보기에도 지금까지 나온 의견 중에 이 방법이 제일 효과적으로 보이고요.”
임 팀장이 코에 걸친 안경을 집게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서아 씨가 이 집에서 나가기를 원치 않고 계속 강 배우님의 가사도우미를 하고자 하신다면 그 기간을 열애설로 포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한 변호사의 말에 서아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너무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들이 눈사태처럼 급작스럽게 그녀를 덮쳤다. 사고 기능이 정지된 듯 머리가 멍했다. 고개를 들자 우혁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여러분, 잠시 우리 둘만 따로 상의를 하고 싶습니다. 자리 좀 비워도 되겠지요?”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서아는 주춤거리며 우혁이 내민 손을 잡았다. 우혁은 서아의 손을 강하게 움켜쥐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우혁의 방문을 열자마자 진한 블랙베리 향이 코를 자극했다. 달콤한 것 같기도 하면서 남성적인 느낌이 나는 우혁의 향기였다. 그레이 톤으로 맞춘 침구와 검은색 소파, 옅은 색의 원목 가구들이 심플하면서도 정돈된 느낌을 주는 방이다.
우혁은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고 소파에 앉는 순간까지 서아의 손을 놓지 않았다. 서아는 엉겁결에 우혁과 손을 잡고 왔지만 막상 방에 들어오자 어색해져서 슬그머니 잡아 뺐다.
서아를 마주하고 앉은 우혁이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서아가 침을 꿀꺽 삼키자 그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민망할 지경이었다.
“은서아.”
서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떨어트리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너도 잘 알 거야. 지난번 내 드라마 시청률 바닥 친 거. 솔직히 말하면 나한테 들어오는 일이 예전 같지 않아. 그마저도 끊긴 지 좀 됐고.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고 하는데 내 상황이 거의 무플이야.”
우혁이 하는 말이 서아의 예상과 너무 달라서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강우혁인데…….”
“그래도 강우혁이기는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그 강우혁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야. 그래서 지금 서아 너한테 부탁하는 거야. 민 기자 말대로 지금 너랑 내가 같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게 부진의 늪에 빠진 나를 건질 수 있는 기회가 될 거 같거든.”
“우혁 씨는 그럼 나랑 열애설이 나는 게 괜찮다는 거예요?”
우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면 일 년, 길면 이 년 안에 헤어지고 정리할 수 있을 거야. 예전처럼 공개 연애가 흠도 아니고 너한테 최대한 피해 가지 않도록 할게.”
서아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손을 움켜쥐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집에서 우혁 씨와 같이 살기 위해서는 공개 연애밖에 방법이 없는 건가요?”
우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아니면 사람들은 별의별 시나리오를 다 만들어서 우리를 이상한 변태 취급할 거야. 뜯어먹을 만큼 뜯어먹고 싫증 나면 뼈만 남은 우리를 던져 버리고 다른 먹잇감을 찾겠지.”
“그럼 나가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우혁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거절에 익숙지 않은 우혁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가면 갈 곳도 없으면서. 네가 다시 돌아와서 뒤치다꺼리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새엄마한테 가려고? 그래서 꿈은 원래 이룰 수 없어서 아름다운 거라는 헛소리나 하며 살려고?”
목소리 끝이 갈라진 우혁의 다그침에 서아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그럼 어떻게 해요! 우혁 씨 지금 거짓말하는 거잖아요. 내가 나가기 싫다고 하니까 일부러 자기 상황을 더 극단적으로 낮춰서 공개연애하자고 하는 거잖아요.”
우혁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눈물이 글썽글썽하던 서아는 우혁의 웃음에 화가 나서 자기도 모르게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쳤다.
“눈치 빠르기는. 내 상황이 그렇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헛소리는 아니야. 우리 회사에서 추측하기에 너는 앞으로 상당 기간 제법 큰 인기를 누리는 화제의 인물이 될 거라고 하네. 나는 그 인기에 편승하려는 거 맞아.”
“정말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짜 연애를 하는 게 꽤 괜찮은 쇼가 될 거야.”
“그럼 많은 사람들을 속이는 건데…….”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으니 하얀 거짓말이라고 하면 안 될까?”
“휴…….”
서아가 깊게 숨을 몰아쉬며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우혁은 그런 서아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직 솜털이 보송한 얼굴에 달싹이는 입술과 끝이 반듯하게 선 콧날 하며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예쁘기도 하구나.
그런 마음이 들었다는 게 너무 당황스러워 헛기침이 나왔다.
‘뭐지? 나 왜 이러는 거지?’
우혁의 헛기침을 재촉으로 알아들은 서아가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개 연애…….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