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침묵이 흘렀다. 우혁이 갑자기 서아의 어깨를 끌어당기다 놀랐는지 멈춰 섰다. 우혁은 서아의 어깨를 쥔 손을 내리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똑, 똑, 똑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장 대표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반대야. 공개 연애라니 민 기자가 특종 하고 싶어서 오버하는 거야!”
장 대표의 목소리에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는 우혁이 서아의 어깨를 잡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우리 열애설 내기로 했어.”
우혁이 싱긋 웃으며 말하자 장 대표는 머릿속에 손을 집어넣고 흐트러트리며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JK401 대표로 말하는데 이건 진짜 아니다.”
“가끔은 감을 믿고 나가는 게 좋은 것 같아. 이번에는 내 감을 좀 믿어줘라.”
우혁이 진지한 얼굴로 장 대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뭐야?”
장 대표가 그 손을 툭 치며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반대 의견을 내세웠지만 우혁은 요지부동이었다.
“서아한테도 나한테도 이게 최고야! 공개 연애로 가자!”
“아, 글쎄 이건 정말…….”
장 대표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숙였다. 마치 그라운드에서 자살골을 넣은 축구 선수처럼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을 보자 서아가 너무 미안해졌다.
“대표님, 죄송해요. 대표님이 나가라고 하면 그냥 나갈게요.”
서아의 말에 우혁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버럭 소리 질렀다. 장 대표는 당황해서 그런 게 아니라며 손을 내 저었다.
“그런 게 아니면 빨리 승낙하시지요. 대표님!”
우혁의 재촉에 장 대표가 하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떨어트렸다.
“나도 모르겠다. 빌어먹을!”
장 대표가 바람을 일으키며 방을 나가버렸다. 장 대표가 나가자 우혁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서아는 가볍게 우혁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내일 팩트 뉴스에서 우혁과 서아가 연인 관계임을 특종으로 보도하기로 했다. 그럼 오후에 장 대표가 소속사 입장을 통해 열애를 인정하는 수순을 따르기 결정했다.
민 기자는 우혁과 서아를 마당으로 불러내 두 사람이 어깨를 감싸 안고 서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사진을 찍었다. 연출된 장면을 몰래 찍는 것처럼 찍느라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민 기자를 보고 있으려니 서아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앞으로 계속 이렇게 거짓된 마음으로 우혁과의 모습을 노출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자 이일이 결코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책 회의는 끝났고 마지막까지 있던 장 대표도 떠났다. 집에 남은 두 사람은 어둠 속에 잠긴 마당의 파고라에 앉아 있었다. 파고라 기둥을 타고 올라간 능소화가 어둠 속에서도 고혹적인 주황색을 뽐내고 있었다.
초저녁에 잠깐 소나기를 뿌린 하늘은 거울처럼 맑아서 달은 밝고 별빛은 총총하게 빛났다. 어제도 그제도 둘이 살던 집이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졌다. 가사도우미였던 서아는 내일이면 그의 연인이 될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반팔 티셔츠 밖으로 드러난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우혁은 그대로 집안에 들어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오늘따라 달이 무척 밝네.”
우혁이 어색한 분위기가 불편해서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서아도 따라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름달이 되기 직전, 옆구리를 부풀린 달이 남쪽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세진이 알려준 목성이 상현달 아래에서 달빛에 지지 않을 만큼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저기 저 달 밑에 반짝이는 게 목성이래요.”
우혁은 서아가 뻗은 손가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태양계에 있는 행성이라 다른 별에 비해 훨씬 반짝이네.”
“그렇지요? 목성에서 옆으로 한 뼘쯤 떨어져 있는 붉은 별 보이지요?”
“응.”
“저건 지구에서 이백팔십 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태양처럼 스스로 빛나는 별이래요.”
“스스로 빛나는 별?”
우혁이 하늘을 향해 있던 얼굴을 돌려 서아를 바라보았다.
“스스로 빛나는 별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야 아름답잖아요. 가까이 있으면 그 열기에 타버리잖아요.”
“상처받을까 봐 겁나니?”
음색이 좋은 우혁의 목소리가 한결 더 부드럽게 들렸다. 서아는 발끝으로 벤치 아래 있는 블록의 모서리를 톡톡 찼다.
“우혁 씨를 찾아오기 전에 친구가 일하는 카페에서 하룻밤 잤어요. 그날 친구가 저 별에 대해 이야기해줄 때는 여길 찾아오면 다칠까 봐 겁이 났어요.”
“지금은?”
“겁이 나면 오늘 같은 결정을 내리지 않았겠지요. 나도 몰랐는데 이 집에 남고 싶다고 말하는 내가 우혁 씨를 믿고 있더라고요.”
“서아야.”
우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서아의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서아는 입을 다문 채 우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혁은 뭔가에 홀린 듯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소나기가 내린 뒤 한결 서늘해진 팔월의 밤공기에 홀린 거 같기도 했다. 파고라 기둥을 덮은 주홍빛 능소화의 향기에 취한 것 같기도 했다. 그도 아니면 이백팔십 광년 너머에서 그들의 머리를 비추는 별빛의 마법에 걸린 걸지도 모르겠다.
놀란 서아는 몸이 굳어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우혁은 입술을 포갠 채 잠시 머물러 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그도 정신을 차리자마자 재빨리 떼어냈다.
“서아야, 그러니까 내가, 이게 그러니까…….”
당황한 우혁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버벅댔다. 그런 우혁을 바라보던 서아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우혁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놀란 우혁이 읍하고 숨을 삼켰다.
“이렇게 하면 우리 둘이 쌤쌤 이니까 괜찮은 거지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서아가 그 말을 마치자마자 후다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놀란 우혁은 서아의 입술이 닿았던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멍한 눈빛으로 서아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