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오지 않았다. 양을 한 마리 두 마리 세다 백아흔여덟 마리까지 셌지만 여전히 눈은 말똥말똥했다. 하는 수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서아가 주방으로 내려가 밀가루 반죽을 시작했다. 마트에 갈 때마다 조금씩 사다 모아놓은 재료들을 뒤져보니 사과호두타르트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타르트 틀인 파트 사블레를 만들기 위해 밀가루 박력분과 아몬드 가루, 슈거 파우더와 소금을 넣고 체를 치기 시작했다. 곱게 체 쳐진 가루에 차가운 버터를 넣고 스크레이퍼로 조각을 내며 섞는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뭐니 뭐니 해도 이렇게 디저트를 만드는 게 최고다.
파트 사블레가 오븐에서 구워지는 동안 사과호두조림을 만들었다. 달콤한 사과가 조려지면서 주방에는 향긋한 냄새가 가득 찼다. 서아는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파트 사블레 안에 애플파운드를 채워 다시 오븐에 구웠다.
노릇하게 구운 타르트 위에 사과호두조림을 얹고 슈거파우더를 뿌리자 완성되었다. 케이크 트레이로 쓰는 은 접시를 꺼내 올망졸망한 타르트를 올려놓자 뿌듯한 마음에 저절로 얼굴이 환해졌다.
“오구, 오구 내 새끼들.”
코에 밀가루를 묻히고 흐트러진 머리를 느슨하게 묶은 채 식탁에 턱을 고인 서아가 타르트를 향해 중얼거렸다.
“나 그냥 여기 있고 싶었어. 욕심인 줄 아는데 아빠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집에 오는 길이 행복했어.”
밀가루가 묻은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타르트에서 나는 향긋한 사과조림 냄새가 그녀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알아. 아빠가 알면 이러는 거 아니라고 야단치실지도 몰라. 그러니까 아빠한테는 비밀이야.”
아직 타르트 만드느라 어지럽힌 싱크대도 치우지 못했는데 졸음이 몰려왔다. 식탁에 양손을 대고 잠깐 머리를 기댔다. 침대에서 아무리 양을 헤아려도 오지 않던 잠이 그녀의 몸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이불 킥을 하느라 잠을 잘 수 없었다. 도대체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이라는 말을 서너 번쯤 하다가 그도 성에 차지 않아 머리를 감싸 안고 베갯속으로 밀어 넣었다.
‘왜 거기서 갑자기 서아의 입술을, 입술을 …….’
생각만 해도 민망해서 땅으로 꺼져버리고 싶었다.
‘나이나 적어야지 이런 감정을 치기라고 이해하지. 부끄러운 줄 알아라. 강우혁, 너 서른다섯 살이야. 열다섯도 아니고 스물다섯도 아닌 서른다섯이란 말이야. 이 자식아!’
그 넓은 킹사이즈 침대 위를 헤엄치듯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우혁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찬물을 틀어놓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을 맞으며 삼십 분을 보냈다. 한여름 수돗물은 찬물을 틀어도 차갑지 않아 성에 차지 않았다. 찬물 샤워로도 식지 않는 머리를 위해 얼음물이 필요했다. 젖은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계단을 내려오던 우혁은 불이 켜진 주방을 보고 멈칫했다.
방을 나서기 전에 확인한 시각은 네 시였다. 서아도 잠을 자지 못하고 있는 걸까? 그냥 서아 혼자 있게 내버려 둬야 하는 걸까? 잠시 망설이던 우혁은 어차피 조금 있으면 아침 시간이고 결국 서아를 피할 수 없다는 생각에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주방과 가까워지자 향긋한 사과 냄새가 그의 코를 자극했다. 무언가 기대감을 잔뜩 불러일으키는 냄새였다. 식탁 위 은 접시에 냄새의 주범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얀색 슈거파우더를 곱게 뒤집어쓰고 있는 타르트에는 사과호두조림이 높게 쌓여있다.
서아는 그 타르트 접시 앞에 머리를 댄 채 잠들어 있었다. 콧잔등에 밀가루를 묻히고 앞치마도 벗지 않은 서아가 아이처럼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우혁은 뭔가에 이끌리듯 서아의 옆에 앉아 잠든 그녀의 모습을 응시했다.
연예계에서 십 년이 넘게 활동하면서 몇몇 여자가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 여자들은 우혁이 그녀들을 사랑하게 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못하고 너무 많이 그를 사랑해 주었다. 강우혁에게 사랑은 받는 거지 주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받기만 하던 사랑은 곧 싫증이 났고 심드렁한 그의 마음은 행동으로 드러났다. 상처받은 여자들은 사랑할 줄 모르는 그를 미워하며 떠났다.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 적 없는 남주의 사랑 연기는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최근 들어 우혁이 주연한 드라마의 시청률 저조는 아무래도 거기에 원인이 있는 것 같았다. 남들은 몰라도 우혁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을 모른다는 걸.
어쩌면 재벌녀들에게 술을 따르던 시절에 마음이 닫힌 걸지도 모른다. 그의 셔츠 속에 수표를 밀어 넣던 여자들을 떠올리며 복수하듯 그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여자들을 무시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 때문에 서아와 단둘이 사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었다. 자신이 여자를 무시하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이니까. 더군다나 아직 어린애 같은 여자한테 다른 마음을 품을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그런데 이제 아무것도 자신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게 너무 부끄럽고 민망해서 감당이 되지 않았다.
“제기랄, 나 뭐 하자는 거냐.”
우혁의 입에서 불쑥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서아가 잠에서 깰까 봐 당황한 우혁이 주먹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서아가 눈을 반짝 떴다.
잠에서 깼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지 눈만 끔벅거리며 우혁을 바라보았다. 머리에 눌린 손이 저린지 이마를 찡그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몇 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