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방문한 친구의 전원주택에는 천일홍이며 해국 같은 가을꽃이 만발했다. 마당 가꾸기에 진심인 친구는 쪼그리고 앉아 연신 호미로 잡풀을 뽑아냈다. 지금 우리 나이가 몇 살인데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 풀 뽑다가는 관절 다 망가진다고 잔소리를 했지만 친구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연신 호미질을 했다. 거슬리는 게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친구 성격 덕분에 방문객에게는 눈 호사를 시켜주는 예쁜 마당이었다. 하지만 내가 전정신경염으로 입원했던 병실에 환자들은 대부분 인공관절을 수술한 중년 여성들이었다. 그러니 몸이 부실한 나는 친구 몸도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너 그렇게 관절 걱정되면 이것도 못하려나?”
친구가 싱긋 웃으며 마당 뒤쪽 공터로 향하는 울타리를 열었다. 그곳에는 짙은 초록색 잎으로 뒤덮인 조그만 고구마밭이 펼쳐져 있었다. 오십이 넘도록 텃밭 한 번 가꿔보지 않은 나는 그만 친구가 들어낸 넝쿨 아래 자주색 고구마에 홀딱 반하고 말았다.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 일하면 관절 망가진다고 잔소리하던 나는 좀 전에 하던 말이 무색하게 생전 처음 해보는 고구마 캐기의 매력에 푹 빠졌다. 생각보다 힘이 들어가는 일이라 그리 오래 하지는 못했지만, 손아귀에 들어오는 동글동글한 고구마를 직접 캐서 통을 채우는 일은 기대치 못한 재미가 있었다.
그렇게 가을날의 추억이 끝났으면 오죽 좋았으랴마는 내 몸은 또 어김없이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다. 친구 집을 방문하기 사흘 전 치매 초기로 인지 장애가 제법 진행된 엄마를 모시고 딸 셋이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일요일부터 화요일까지 이박 삼일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사흘을 출근하고 다시 고속도로를 한 시간 반 거리 운전해 토요일 친구 집을 방문한 것이다. 나는 과연 내가 이 일정을 소화하고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까 약간 의구심을 가진 상태였다.
매번 여행을 제안하면 딸들의 일정이나 상황을 고려해 사양하기만 하던 엄마였다. 조심스럽던 엄마가 인지 장애가 오자 이제는 당신의 욕망에 거리낌이 없어져 함께 가고 싶다고 하셨다. 그런 여행이었으니 얼마나 소중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마침 다음 주에 친구 생일 모임이 잡힌 것이다.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이 지경까지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친구 집에서 눈뜬 아침 나는 사정없이 돌아가는 천장을 보며 망연자실했다.
전정신경염이 재발했거나 아니면 심각하게 이석증이 온 것이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게 어지러웠고 구역질이 났다. 전정신경염으로 119에 실려 가던 상황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화장실을 가기 힘들 정도로 몸에 균형 잡기가 어려웠다. 새벽 다섯 시 홀로 벽에 기대앉은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했다. 여기는 집에서 한 시간 반 거리의 친구네 집이었고 나는 차를 가지고 온 상황이었다. 도저히 운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집에 돌아가려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 것이다.
뒤늦게 자영업을 시작해 날마다 힘들어하는 남편이 쉬는 주말 그에게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이곳으로 와서 나를 데려가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친구에게 부탁해 내 차를 운전해 나를 집에 데려다주고 버스 타고 가라고 해야 하나? 다른 사람에게 민폐 끼치는 것을 어지간히 싫어하는 나는 지금 어지럽고 구역질이 나서 걸음을 걸을 수 없는 상태인 것보다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것이 더 걱정되었다.
그런데 사람이 궁하면 어떻게든 방법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집에 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던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바로 ‘대리 기사’였다. 처음에는 티맵으로 대리 기사를 구했지만, 새벽 시간 더군다나 전원주택이 있는 교외 지역에서 매칭은 쉽지 않았다. 겨우 검색을 통해 금액을 올려 기사를 구하자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은 친구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대리 기사님과 차에 올라타자 여명이 밝기 시작한 도로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술을 마시지 않아 대리 기사를 처음 불러 본 나는 이 순간 기사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고 인사했다.
“제가 원래 이곳 사람이 아닌데 일진이 꼬여서 저도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왔거든요. 그런데 손님에게 이렇게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니 갑자기 제 일에 사명감 같은 게 생기네요.”
어지러움을 견디기 위해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던 나는 잠시 고개를 들어 대리 기사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밤새 대리운전을 하다 아침 여섯 시가 넘어까지 고속도로를 달리는 그의 얼굴에는 피로의 기색만큼이나 뿌듯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나는 그 덕분에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무사히 안전하게 집에 돌아갈 수 있었고 그는 나의 감사한 마음 덕분에 길었던 밤의 노고가 사그라드는 순간이었다. 몸을 생각하지 않은 무리한 일정 때문에 빚어진 아침의 해프닝이었지만 그 사건의 결말은 온전한 해피엔딩처럼 여겨졌다.
노년을 향해 나아가는 나는 매번 이렇게 약한 몸 때문에 숱한 사건을 겪는다. 그렇지만 그 몸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을 만나고 또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왕이면 건강하고 활달하게 노년을 맞이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몸으로도 작은 순간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 작은 마음을 소중하게 모아서 나는 또 오늘 하루를 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