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아흔이신 지인의 아버님이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심한 감기 증세와 소변을 보지 못하는 상태로 입원하신 아버님은 이후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셨다. 병원 입원 당시 간호의 어려움으로 아버님의 손발을 침상에 결박해 놓은 것을 본 지인은 요양병원으로 모시라는 담당 의사의 권유를 거절하고 집에서 병구완을 시작했다.
병원에 입원하는 날 가족들은 아버님 상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을의 보건진료소장이 방문하는 바람에 119에 구급차를 요청해 응급실로 들어가셨다. 아버님이 퇴원 후 기약 없는 간호에 들어가자 어머니는 보건진료소장을 원망했다. 그날 보건진료소장만 아니었으면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거고 그러면 환자 본인이나 자식이나 고생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기약 없을 것 같던 병구완은 육 개월로 끝이 나고 아버님은 돌아가셨다.
그 육 개월은 가족들이 아버님과의 작별을 준비하고 아버님도 세상을 떠날 마음가짐을 가지기에 알맞은 시간이었다. 어떤 죽음도 호상이라 함부로 말할 수 없기에 지인에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보기에 아버님의 임종은 더도 덜도 할 것 없이 적당한 때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례를 치른 지인은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혈압이 150이었고 그날 아침에도 물을 떠서 입에 넣어 드리니 무의식 상태에서 삼키셨다고 했다. 돌아가시기 직전임에도 심장은 그렇게 빠르게 뛰었고 몸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어떻게든 구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살고자 노력하는 생명에 대해 경외감이 들었다고 했다.
젊어서는 죽음이 막연하기만 했다. 죽는 것은 무섭지 않지만 죽는 순간의 고통은 무섭다고 떠벌리고는 했다. 아직 부모님이 살아계신 내가 가장 직접적으로 겪은 죽음은 반려견 별이의 죽음이었다. 십삼 년 간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이면 배변판을 닦았고, 하루 두 번 밥을 주었으며 일요일에는 목욕을 시켰다.
내가 근무하는 동물병원에 백신을 사러 오는 견주에게 부탁해 집에 들인 강아지는 흑요석처럼 까만 눈동자를 가진 몰티즈였다. 우리 가족은 열세 살이 되어도 강아지 같은 얼굴의 별이가 최소한 십칠 년쯤은 살지 않을까 짐작했었다. 그런데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가끔 하루 이틀 밥을 안 먹는 날이 있어서 처음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사흘째 되는 날 이게 예사롭지 않은 일임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판단을 내려야 했다. 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고 입원을 시키며 얼마라도 더 살 수 있게 치료를 해보려 하든지 아니면 그 상태로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하든지 결정해야 했다.
그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때면 대부분 부작용을 겪었고 낯선 곳을 극도로 싫어하는 예민한 별이를 병원에서 시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별이는 식음을 전폐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옷방 구석진 자리에 누워 있다가 오 일째 되는 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 나이만 먹었지 제대로 된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던 나는 너무나 평온했던 별이의 죽음에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
죽는 과정은 생각보다 괴롭지 않았다. 죽음은 몇 시간의 헐떡거림과 약간의 경련 뒤에 찾아왔고 남편의 훌쩍임 소리만 적막한 방 안을 채웠다.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하기만 했지 뒤치다꺼리는 하지 않던 딸이나, 처음부터 개를 키우는 것에 반대하던 남편 사이에서 궂은일은 모두 내 차지였다. 혼자 별이를 보살피던 십삼 년의 시간을 그 마지막 순간에 모두 보상받는 것만 같았다. 너무 갑작스러웠지만 별이는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아버님의 임종을 지킨 지인도 죽음의 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고 했다. 숨이 멈췄다 터지기를 서너 번 반복한 이후에 다시 숨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이후로 위독한 순간이 오면 절대 병원에 데려가지 말라던 아버님의 부탁을 지인은 따랐고 아버님은 집에서 그렇게 돌아가셨다.
죽음의 형태는 너무 다양해서 하나로 정의하기가 어렵다. 나의 시누는 쉰아홉 살에 여름휴가를 다녀와 피곤하다며 잠들었다가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자다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큰어머니는 파킨슨병으로 십 년을 요양원 침대에 누워 있다 돌아가셨다. 쉬운 죽음도 있고 지독하게 길고 어려운 죽음도 있다. 단지 내가 경험한 죽음이 그리고 가까운 지인이 경험한 죽음이 어렵지 않았다고 모두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막연하게 느끼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는 순간의 공포가 덜해진 것은 사실이다.
아주아주 멀게만 여겨지는 죽음이 때로 턱 밑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어차피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일이기에 겁내지 말고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는 게 최선이 아닐까 싶다. 지구상에 생명체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한 번씩 공평하게 겪을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