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신경염
어린 시절의 어지럼증은 두 가지 종류였다. 여름날 마루에 누워 책을 보다 일어서면 핑 하고 도는 느낌의 현기증이 하나고 나머지는 차멀미였다. 나를 낳기 전부터 택시 기사를 하던 아버지는 차주가 되고 택시 회사 대표까지 하셨다. 그러니 나는 태어날 때부터 집에 차가 있었다. 브리샤부터 제네시스까지 아버지의 차는 다양했고 남들보다 일찍 자가용을 탈 일이 많았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래서 더 멀미가 심했다. 운전 습관이 택시 기사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버지의 차를 타는 것은 두려웠고 긴장감은 멀미를 가중했다. 특히 구불구불한 고갯길은 최악이어서 영동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 수학여행을 강원도로 갔던 나는 이 박 삼일 내내 멀미에 시달려서 악몽 같은 추억을 만들었다.
기립성 어지럼증도 차멀미도 성인이 되고 나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끔 어지럽다고 느낄 때가 있었지만 신경 쓰일 수준은 아니었다. 서른다섯 살에서 마흔다섯 살까지 십 년은 내 인생 가장 황금기였고 건강했다. 그리고 새로운 시기의 문을 연 것의 시작은 ‘어지러움’이었다.
창덕궁 후원 관람을 마치고 피곤한 몸에 버스를 탔는데 일요일 오후 광역 버스가 만석이었다. 아름다운 정원 관람은 좋았지만 지친 상태였던 나는 흔들리는 버스에서 손잡이를 잡은 채 한 시간이 넘도록 서 있어야 했다. 그날 밤 너무 피곤해서 잠이 오지 않는 상태가 이어지더니 갑자기 구역질이 나고 어지럽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어지럼증은 지금에 비하면 약소하지만, 당시에는 몹시도 당황스러웠다. 이명을 동반한 어지럼증은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고 잠들기 어려운 날이 계속되었다.
가까운 이비인후과에서는 청력이 감퇴하면서 생기는 이명이니 적응밖에 답이 없다며 신경 안정제만 처방했다. 한의원에서는 메니에르라며 약을 권해서 먹었다. 한약을 먹을 때는 괜찮았지만 약을 다 먹자 다시 어지럼증이 시작되었다. 멀미약도 먹어보고 이것저것 다 해봤지만, 어지럼증은 시간이 필요했고 이명은 적응이 필요했다. 지금은 어지럼증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잘 알지만, 당시에는 제대로 알지 못해 조바심을 쳤다. 언제나 문제는 과로에서 오고 나에게 있어서 ‘과로’라는 것이 남들의 과로에 비해 역치가 너무 낮다는 것이다.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한 마흔다섯 살에 시작된 어지럼증은 곧 이석증으로 발전했다. 이석 치환술을 받고 보나링에이정과 디아제팜, 혈액순환 개선제를 먹으며 관리에 요령이 생기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어지럼증이 덮치면 약을 먹었고 곧 안정됐다. 이때 내가 가장 집착한 약이 디아제팜인데 이 약은 불안장애에도 쓰는 신경안정제로 효과는 좋았지만 의존성 및 금단 현상이 있다는 이유로 의사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약이다.
몇 년을 이석증과 자잘한 어지럼증으로 시달리던 시기가 지나고 안정기가 찾아오는 듯했다. 가방에 항상 넣어 다니던 디아제팜을 안 먹은 지 몇 달이 되었다고 생각하던 때 어지러움의 끝판왕인 전정신경염이 찾아왔다.
흔히들 이석증은 걸어서 병원으로 향하고 전정신경염은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간다고 말한다. 나는 정확히 이 말대로 움직인 사람이다. 이년 전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몸을 움직이는데 뭔가 다른 날과 좀 다른 느낌이었다. 어지러운 것 같기는 한데 정확하지도 않고 아침 식사를 차렸지만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출근을 못할 것 같다고 직장에 전화하고 침대에 누웠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순간 갑자기 바닥과 천장이 뒤집히며 극심한 어지럼증과 구토가 이어졌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구토에 압력을 이기지 못해 머리가 터지는 것 같았다. 무슨 정신으로 전화를 집어 들었는지 모르지만 119에 구급차를 요청했다. 문제는 혼자 있던 내가 119 구급대원들이 집에 도착했을 때 현관까지 가서 문을 열어주는 일이었다. 벨소리가 들렸고 나는 현관으로 가는 도중 끊임없이 구토했다. 구급대원들이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는 기억이 정확히 나지 않는다. 응급실에서 검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눈을 감은 채 정신이 혼미했던 나는 무슨 상황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입원 병실이 정해지고 침대로 옮겨진 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구급대원들이 챙겨준 겉옷 주머니에서 끊임없이 핸드폰 벨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연락이 되지 않는 나를 찾아 남편이 이것 저곳을 돌아다닌 모양이었다. 집에 가보니 온통 구토의 흔적뿐이고 직장은 나오지 않았으니 무슨 일인가 싶어 몸이 달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손을 뻗어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