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슴벌레식 문답
이석증인줄 알았던 어지럼증은 검사 결과 전정신경염 재발로 밝혀졌다. 갑자기 어지럼증이 심해지던 날 옆구리 통증도 강도가 높아지면서 밥을 먹을 수 없었다. 응급실을 가도 뻔한 이야기가 나올 걸 알기에 주말을 꼼짝없이 누워 지내며 앓았다. 그렇게 시작된 어지럼증과 통증, 소화불량이 이주를 넘겼다. 첫 주는 출근도 못 한 채 누워 있기만 했고 지난주부터는 겨우 출근은 하지만 조기 퇴근을 하며 근근이 버티고 있다.
전정신경염이야 병명이 나오는 질환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옆구리 통증은 정확한 원인도 없다. 방광염이 자주 걸리면서 신우신염까지 간 이후로 걸핏하면 옆구리가 아프다. 그걸 방치하면 통증은 점점 내려와 방광까지 아프니 어쩔 수 없이 항생제와 소염진통제를 먹는다. 평소에 먹던 세파클러 캡슐이 더는 약효가 없어 퀴놀론계열로 바꿔봤지만, 옆구리는 계속 아팠다. 신장내과에서 CT까지 찍었으나 별 이상이 없다는 소견인데 나는 끊임없이 옆구리가 아프다.
결국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서 찾아간 서울의 비뇨의학과에서는 또 염증이 아주 심하다고 한다. 가까운 이차병원 신장내과에서는 보이지 않던 염증이 어째서 다른 로컬 병원에서는 보이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그동안 써본 항생제를 나열하자 의사가 한숨을 쉰다. 최근 나온 항생제는 써 볼 만큼 써봤으니 이제는 쓰지 않는 예전 항생제인 클린다마이신을 처방받았다. 항생제를 너무 많이 써서 감수성 검사가 가능할지 모르지만 시도는 해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주 역시 감수성 검사는 실패하고 클린다마이신이 염증을 잡는 것도 실패했다. 그리고 다음 처방이 테트라싸이클린이었다.
내가 근무하는 동물병원에서 많이 쓰고 있어서 이름도 익숙한 테라마이신은 생각보다 부작용이 심했다.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고 그러잖아도 소화가 어려운 위장은 음식물을 받아내지 못하고 구역질을 했다. 사나흘 테라마이신을 먹다 포기한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으로 다시 지역의 이차병원 비뇨의학과를 갔다. 신장내과에서는 염증이 없다고 했으나 이주 후 로컬 병원에서는 염증이 있다고 했으니 이차병원에서도 이제 염증이 나올 테고 좀 더 나은 약을 써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었다.
그런데 하루 전 로컬 병원에서는 있다고 하는 염증이 이튿날 이차병원에서는 없다고 한다. 의사들은 너무 바쁘고 내 하소연에 귀를 기울일 시간이 없다. 내가 지난 팔월부터 항생제를 먹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통증이 계속됐다고 하지만 의사들은 염증이 없다며 치료하기를 거부한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럽다. 더는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만 같았다. 항생제를 먹지 않으면 옆구리 통증이 방광으로 내려가 조이고 아픈데, 밤에 잠을 이루기 어렵게 자주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하는데 이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전정신경염으로 누웠다가 일어나기가 몹시 어려운 상황 아닌가.
죽고 싶었다. 지긋지긋했다.
그런 마음으로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읽은 소설이 김승옥 문학상 수상집에 실린 권여선의 ‘사슴벌레식 문답’이었다. 몸이 아프니 문장에 깃든 통증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미셸 자우너의 ‘H 마트에서 울다’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읽으면서 몸이 너무 아파 혼이 났다. 이런 책은 아플 때 함부로 읽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일담 소설이며 아픈 이야기였지만 ‘사슴벌레식 문답’ 은 아픔에 더해 위안을 주는 이야기였다.
한때 절친이었던 정원의 죽음을 둘러싸고 나와 부경, 그리고 경애가 겪는 이야기는 전형적인 후일담이다. 조직을 배신하고 세속적인 성공을 좇는 경애와 처절하게 배신당한 부영, 그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화자인 나는 정원의 이십 주기 추모식을 맞아 그날을 떠올린다.
정원이 살아있고 네 사람이 똘똘 뭉치던 그 시절 강촌에서의 하루. 방에 들어온 사슴벌레를 보고 어찌할 줄 모르던 정원과 약 때문에 버둥거리는 사슴벌레에게 빗자루를 매달아 청소를 시키면 되겠다고 했던 나의 대화는 ‘사슴벌레식 문답’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방충망도 있는데 그렇게 큰 사슴벌레가 어떻게 방에 들어왔느냐는 정원의 질문에 숙소 주인여자는 태연하게 말했다.
어디로든 들어와.
이제 정원과 나는 사슴벌레식 문답을 한다.
너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
나 어떻게든 그렇게 잔인해.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은 무엇으로든 살아.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강철은 어떻게든 단련돼.
모든 대화에 든이 붙으면 뒤집힌 채 버둥거리며 빙빙 도는 구슬픈 사슴벌레의 모습 앞에서도 우리는 삶에 의연해질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권여선은 자칫 진부해질 수 있는 후일담 안에 우리말이 아니면 절대 표현할 수 없는 맛을 살려 여운이 많이 남는 깊은 소설을 써냈다.
배신당해서 삶이 망가진 부영도 배신하고 승승장구하는 경애도 오지 않은 정원의 이십 주기 추모식에서 나는 다시 사슴벌레식문답을 떠올린다.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어떻게든 이렇게 됐어.
쓸쓸하고 쓸쓸한 일이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이렇게 된 것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잠시 잊어버렸던 통증이 다시 몰려와 옆구리를 잡고 허리를 구부렸다.
이러고 어떻게 사니?
그러자 사슴벌레가 대답한다.
이러고 어떻게든 살아.
그렇다 나는 어떻게든 살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