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의 나는 안녕하신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by 은예진

내가 무엇을 전공해야 했고 어떤 일을 해야 했던 사람인가를 뒤늦게 깨달았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빠른 거라고 하지만 그건 어림없다. 박명수가 했다는 말이 사실인지 몰라도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정말 늦은 거다. 이미 늦어서 깨달았다. 대학 원서를 잘못 써도 한참 잘못 썼다는 것을 말이다.


국민학교 이학년 때 방학 숙제로 독후감 쓰기가 있었다. 독후감을 쓰려면 먼저 책을 읽어야 하니 동네 서점과 문구점을 동시에 하는 곳에서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를 샀다. 그리고 나는 이야기를 가진 ‘책’이라는 것과 사랑에 빠졌다. 이후 우리 집에는 100권짜리 동서 문화사에서 나온 딱따구리 문고가 들어왔고 나는 열렬히 읽어댔다. 중학생 때 박완서의 ‘나목’과 윤동주 시집 ‘별 헤는 밤’을 끼고 사는 문학소녀의 시절을 거쳐 고등학생이 되었다.


대학은 국문과를 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반드시 국립대인 C대를 가야 한다고 여겼다. 사립대인 D 대학에는 훗날 좀 더 쓸모 있을 전공 그러니까 사회복지학과나 문헌정보학과 같은 학과가 있었지만, 개념 없던 나는 국립대를 가야 부끄럽지 않은 거로 생각했다. 그건 고등학교에서 그 지역 대학을 C 대학, D 대학 순으로 서열을 매겨놨기 때문일 것이다.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음에도 그 또한 막연해서 원서를 쓸 때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성적에 맞춰 쓴 원서는 C 대학 경제학과였고 기쁘게도 붙었다. 아무 생각 없이 붙어버린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전공을 전혀 살리지 못했으며 어쩌다 보니 동물병원에 취업해 책을 읽고 있었다. 자리를 지켜야 하지만 할 일은 없는 직장에서 나는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라는 사람은 경제학과가 아니고 국문과도 아니며 D 대학 문헌정보학과에 갔어야 했다고 말이다. 도서관 사서 일이 크게 돈을 버는 일도 아니고 대단한 직장도 아니지만 내 적성에 가장 맞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이 들면서 나의 정체성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진로를 제대로 정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누군가 인생을 되돌릴 수 있다는 가정하에 어느 시기로 가고 싶냐고 물으면 나는 고민하지 않고 대학 원서를 쓰던 그 시간으로 가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가끔 생각한다. 평행 우주 어딘가 또 다른 나는 문헌정보학과에 가서 도서관 사서를 하고 성공했다면 지금쯤 관장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다중 우주를 그린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보면 양자경이 분한 에블린은 어떤 공간에서는 현재 남편인 웨이먼드와 헤어지기도 하고 또 다른 공간에서는 웨이먼드 존재 자체가 없기도 하다. 도서관 관장이 된 나도 아마 현재의 남편을 만난 버전이 있고 그렇지 않은 버전이 있지 않을까 싶다. 평행 우주의 나는 의미 있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다른 나를 만드는 것이니 C 대학을 졸업했지만 D 대학 도서관에서 고시 공부를 하던 남편을 만난 나와 만나지 않은 내가 존재할 것이다.


현재의 남편을 만난 도서관장인 나는 한때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혼한 채 홀로 딸을 키웠을지도 모른다. 남편을 만나지 않는 나는 같은 직장에서 비슷한 수준의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지금의 딸과 전혀 다른 자식을 낳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식은 부족한 것 없이 키운다고 노력했지만 나를 근심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고 나머지 모든 일이 순조로운 것은 절대 아니니 말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현재의 에블린은 모든 멀티버스 중에 가장 실패한 에블린이다. 생활력 없는 남편은 남몰래 이혼을 준비하고 있고, 딸은 레즈비언에다 살까지 쪄서 봐주기 어려운 꼴이다. 거기다 탈세 의혹으로 국세청에서 그녀가 운영하는 빨래방의 기계들을 가압류한 상태다. 미치기 일보 직전인 에블린을 찾아온 다른 우주의 웨이먼드가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에블린은 어이가 없었다. 왜 하필 내가 우주를 구할 수 있다는 거지? 그때 웨이먼드는 모든 가능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가능성들이 남아서 에블린이 최고의 전사가 될 수 있는 거라고 한다.


무언가 슬프기도 하면서 수긍이 가기도 한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는 게 없는 것만 같은 현실, 거기다 생활력 없이 다정하기만 한 남편. 모든 가능성을 잃어버린 그 최악의 에블린이 나처럼 보였다. 대학 선택을 앞둔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나. 이미 늦어 버린 나는 어느 모로 보나 멀티 유니버스 중에서 최악의 나인 것 같았다.


영화는 최악의 에블린이 멀티 유니버스의 또 다른 에블린들의 능력을 끌어당겨 결국 해피엔딩을 이끌어낸다. 최후의 승자는 다정함이었다. 실패한 현실의 에블린에게 자신을 투영하던 나는 웨이먼드와 꽤 비슷한 철없고 다정하기만 한 남편을 바라본다. 어떤 우주에서는 당신과 이혼을 했을 거고 어떤 우주에서는 당신을 아예 만나지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렇다고 뭐 대단히 행복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여운이 남는 건 웨이먼드와 헤어지고 무술을 배워 영화배우로 성공한 어떤 우주의 에블린과 웨이먼드가 만나는 장면이다. 미국으로 떠나 성공한 웨이먼드는 다른 웨이먼드와 같은 사람인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근사하다. 그런 웨이먼드는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말한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당신과 헤어지지 않고 빨래방을 하면서 자식을 키우며 살고 싶다고.


어쩌면 말이다. 다른 우주의 도서관 관장이 된 나는 그토록 사랑하던 책 읽기가 일이 되어 더는 책 냄새도 싫어져서 책을 즐거움으로 읽기만 하는 어떤 곳의 나를 꿈꿀지도 모른다. 철없지만 다정한 남편과 똑똑하고 야무져서 생각만 해도 흐뭇한 딸을 가졌지만 변변찮은 삶을 사는 이곳의 나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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