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 밖과 안

by 은예진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

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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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내려쬐는 쨍한 여름날, 한가족이 강가에서 소풍을 즐기고 있다. 아들 둘에 딸 둘 그리고 갓난아기까지 다섯 명의 아이를 둔 부부는 다복한 모습이다. 이 가족은 철조망이 높게 쳐진 아우슈비츠 수용소 바깥에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아우슈비츠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령관으로 지낸 루돌프 회스의 가족이다.


루돌프 회스는 실제 인물로 이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그의 자서전과 마틴 에이미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역사적인 박물관이 된 현재의 아우슈비츠를 방문한 사람들은 그 압도적인 죽음의 흔적에 정신적인 타격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본 적 있다. 명화 앞에서 스탕달 신드롬을 겪는 것처럼 높은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우슈비츠에서 혼란을 겪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감독 조나단 글레이저는 유대인이었으니 오죽했을까 싶다.


루돌프 회스의 아내 헤트비히는 아우슈비츠 담장 밖에서 인생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폴란드인들을 쫓아내고 만든 관심지역( zone of interest) 주거단지에 살고 있는 회스 가족은 그곳을 천상의 낙원으로 꾸며 놓았다. 신록이 우거진 여름날 아름다운 꽃으로 가득한 정원에 수영장까지 갖춘 집은 호사스럽게 그지없다. 헤트비히는 집안 일하는 유대인들을 여럿 부리면서 아우슈비츠의 여왕으로 군립했다.


수용소에서는 밍크코트가 오기도 하고 상자 가득 귀한 식료품이 오기도 한다. 헤트비히는 일하는 유대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각장에 집어 처넣어 버린다고 윽박지른다. 친정엄마가 이들 집에 방문했을 때 헤트비히 의 행복감은 절정을 이룬다. 엄마는 유대인 가정의 가정부로 일했으니 호화로운 아우슈비츠의 삶은 헤트비히 모녀에게 자긍심을 불러일으킨다. 친정엄마가 담장 너머 불길하게 올라오는 검은 연기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헤트비히에게는 일상의 한 조각일 뿐인 검은 연기지만 친정엄마에게는 아니었다. 딸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음에도 친정엄마는 그 연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인사도 없이 떠나버린다. 헤트비히는 엄마가 놓고 간 편지를 신경질적으로 화로 속에 집어넣어버린다. 그녀로서는 이 아름다운 곳을 거부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헤트비히는 남편 루돌프가 승진해서 아우슈비츠를 떠나야 할 때조차 자신과 아이들은 이곳을 떠날 수없다며 머무르기 원한다.


루돌프는 좋은 아버지, 말과 라일락 나무를 아끼며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은밀하게 자기 사무실로 여자를 불러 일탈을 즐기기도 하지만 아내와 아이들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런 남자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유대인을 효율적으로 더 많이 죽일 수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나치 사령부의 부부동반 파티장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한꺼번에 죽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한다. 그런 루돌프 회스가 어째서 파티가 끝난 뒤 홀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헛구역질한 것일까? 오래도록 의문이 남는 장면이었다.


아우슈비츠 담장 밖은 이렇게 쨍한 하늘과 화려한 색감으로 가득하다. 그렇다면 담장 안은 어떤 모습일까? 영화 말미에 현대의 아우슈비츠 모습이 나온다. 직원들이 청소기를 돌리는 아우슈비츠에는 죽은 이들의 옷과 신발이 전시되어 있다. 공간에도 옷에도 신발에도 색이 없다. 흑백 화면이 아님에도 색은 날아가고 오직 형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담장 안의 모습을 그린 책중 가장 유명한 책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서에서'이다. 유대인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이야기인 이 책은 수용소 문학의 백미로 알려져 있다. 특히 면도를 하라는 이야기는 숱하게 인용되는 문구이다.


아우슈비츠에 도착해 몇 번인가의 분류를 거치고 살아남아 막사로 들어갔을 때 구역을 벗어나면 안 되는 규칙을 깨고 동료가 찾아왔다. 그는 프랭클을 안심시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능하면 매일같이 면도를 하게. 유리 조각으로 면도를 해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마지막 남은 빵을 포기해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일세. 그러면 더 젊어 보일 거야. 뺨을 문지르는 것도 혈색이 좋아 보이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이지. 자네들이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어. 일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루돌프 회스가 유대인을 죽이는데 골몰한 나머지 너무 많이 가스실로 보내 버리자 다른 나치들이 자신들이 운용해야 할 인력마저 모두 죽여버릴까 봐 걱정했다. 노동력이 필요한 나치는 회스의 무자비한 살육이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프랭클의 동료는 노동력이 필요한 그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수단으로 면도를 추천한 것이다. 면도를 하는 이는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는 그의 조언은 성공적이었다.


살아남아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에서 죽어나간 동족에게 부채 의식이 있었다. 그는 우리 중에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자조적인 말을 한다. 수용소 안에서 가장 영양섭취를 잘하는 이는 '카포'였다. 이는 수용소에 있는 수감자들을 관리하기 위해 유대인 중에 뽑힌 이들이었다. 수감자 중에서도 가장 성질이 난폭한 사람들에게 이 일이 맡겨졌고 그들은 감시하는 병사나 나치대원보다 더 악랄하게 굴었다. 카포뿐만 아니라 오랜 수감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야비한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던 터라 살아남는 것은 계속되는 우연과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양심을 잃어버린 사람들뿐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터 프랭클은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 안에서, 그리고 사랑을 통해 실현된다고 쓰고 있다. 수용소 안에서 웅덩이에 빠지고 총의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으면서도 주어진 고통을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우슈비츠 담장 안에도 짙은 청색에서 핏빛으로 끊임없이 색과 모양이 변하는 구름으로 살아 숨 쉬는 서쪽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잿빛 막사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는 그 하늘을 보며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라고 외치는 누군가가 있었다. 담장 밖의 꽃들이 아무리 화려해도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에 시선이 가던 나는 도리어 빅터 프랭클이 본 아름다운 서쪽 하늘의 형형색색 구름을 떠올리기 어렵지 않았다.


넷플릭스에 최근에 올라온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마지막 장면에 바이런의 시구가 나온다.

'그리하여 마음은 부서질 것이나 부서진 채로 살아가리라'


자신의 창조주에게 버림받고 상처 입은 프랑케슈인이 동트는 해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죽을 수 없이 영원히 계속되는 삶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그들도 부서진 채로 살아갈 것이다. 그들이 부서진 채로 살아가는 동안 루돌프 회스는 아우슈비츠에서 교수형을 당하고 그의 아내 헤트비히는 재혼했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어쩌면 회스가 토악질하던 장면은 그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아우슈비츠의 비극이 채 100년도 되지 않았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는다. 이념의 충돌 속에 우리 땅에서 벌어진 풍문 속의 살육 또한 100년이 지나지 않았다. 인간은 종의 본능을 거역할 만큼 숭고해질 수 있지만 추락의 깊이 또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떨어질 수 있는 존재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는 적외선 촬영으로 한 소녀가 밤마다 수감자들을 위해 수용소 벽에 사과를 놓아두는 장면이 나온다. 감독은 실제 인물이었다는 폴란드 소녀의 모습에서 희망을 그려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부서진 채로도 살아갈 희망을 찾는 존재다. 아무 이득없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인간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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