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괜찮은데 밤이면 약간의 방광 통증과 함께 잠에서 자주 깬다. 방광염이 심하던 시기에 버릇인지 아니면 우울증 약 이미프라민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두세 번씩 잠을 깨는 것은 그렇다 쳐도 꿈에 시달리는 것은 조금 피곤하다. 아주 선명한 꿈을 꾸는데 중간에 깨서 돌아다니다 자도 다시 꿈을 이어서 꾼다. 나는 이렇게 꿈이 선명한 것은 이미프라민 때문이라고 짐작하지만 알 수없다.
어지럼증 때문에 신경과에서 처방받은 약 중에 뇌전증에 쓰는 가나펜닌이라는 약이 있다. 이 약을 처음 먹었을 때 나는 약간의 조증에 발끝이 땅 위에서 10센티쯤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중독적으로 먹어대던 판피린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으며 삶에 의욕이 생겼다. 약을 처방해 주신 신경과 선생님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먹어본 내가 더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몸은 신기해서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기능이 있는 것 같다. 몸은 금세 약에 적응하고 조증의 축복은 사라졌다. 가나페닌이나 이미프라민처럼 향정신성 약물들은 젊은 이들에게는 자살 충동의 위험이 있지만 나이 든 사람에게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이미프라민도 처음에는 엄청난 부작용을 겪었다. 통증이 가라앉는 대신 온몸에 물이란 물은 죄다 증발시켜 버린 것처럼 입이 바짝 마르고 변비가 심했다. 항상성 덕분에 약에 적응되었고 과일로 목을 축이면 살만한 수준이 되었다. 그렇지만 두 시간 간격으로 자다 깨기를 반복하는 것과 정신 사나운 꿈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그중 한 꿈 때문이었던 것 같다. 꿈속에서 나는 대학 졸업반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취업 때문에 걱정하고 있는데 나는 작년에 이미 공무원시험에 합격해서 걱정이 없었다. 나는 내일부터 출근이었고 발령받은 곳은 성남의 골목 안에 있는 작은 미술관이었다. 그곳은 공무원들이 복지부동하는 곳이었고 나는 신입이라고 아주 허접한 업무를 받았다. 남들은 다니기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는 출근할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이건 무슨 특별한 사건도 없는 일상 같은 꿈이었다. 어차피 맥락 없이 흉측한 꿈에 지쳐 있어서 이런 꿈은 좋은 꿈이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지만 우리는 종종 과거로의 회귀를 꿈꾼다. 한동안 웹소설계에 회귀물이 유행이었던 것은 과거로 가면 비트코인을 사모을 거고 삼성 주식을 살 거라는 사람들의 꿈이 반영된 것이다. 나는 과거로 간다면 고삼으로 돌아가 문헌정보학과를 갈 거라는 소리를 백번도 더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꿈을 꾸고 갑자기 전혀 엉뚱한 일이 하고 싶었다.
나는 과거로 간다면 엄마가 치매가 걸리기 전인 육십대로 돌아가 엄마에게 하고 싶 걸 다 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차피 칠십 대가 되면 치매에 걸리니까 지금 정신 온전할 때 지랄 맞은 남편 무시하고 살림 걱정 집어치우고 자식들은 신경도 쓰지 말아! 그리고 엄마의 작은 차 마티즈를 끌고 세상 훨훨 날아다니며 하고 싶은 거 다 해. 세상은 넓고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목이 메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과거로 가면 정신 멀쩡한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나의 말에 남편은 지금도 엄마는 행복하다며 나를 위로한다. 그렇다 치매에 걸려서 자식만 기억하고 손자들은 잊어버린 엄마지만 현재의 감각은 멀쩡히 살아 있다. 맛있는 음식이 좋고, 세신하고 개운한 기분이 좋으며 바다를 보면 멋있다고 감탄한다. 지금 아버지가 나름 최선을 다해 엄마를 보살피는 것도 엄마가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살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나는 엄마의 삶에 대해 함부로 참견할 수 없는 것이다.
2017년에 KBS에서 '고백부부'라는 드라마를 방영했다. 장나라와 손호준이 주인공인 드라마로 38세 동갑내기 부부인 마진주(장나라)와 최반도(손호준)는 삶에 지쳐있었다.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사는 건 녹녹지 않고 두 사람은 오해와 갈등으로 지쳐 이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연유인지 이들은 1999년 대학교 1학년,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가 눈을 뜬다.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이다 두 사람은 다시는 저 원수 같은 최반도와 마진주와 엮이지 않으리라 결심한다.
마진주와 최반도 부부 사이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진주의 엄마 죽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1999년으로 돌아가자 그렇게 보고 싶었던 엄마가 살아있는 것이다. 진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엄마를 껴안고 눈물을 흘린다. 보고 싶던 엄마가 살아 있고 푸릇한 스무 살로 돌아온 두 사람은 그렇게 삶을 바꿀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 있다. 이곳에 엄마는 있지만 두 사람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한 존재인 아들 서진이가 없다. 둘이 헤어지면 서진은 영영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진주는 꿈속에서도 서진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린다. 엄마가 있는 곳에는 서진이 없고 서진이 있는 곳에는 엄마가 없다.
내가 남편 흉을 보며 한숨을 쉴 때면 친구가 자식을 생각하면 마음이 바뀐다고 했었다. 저 사람이 없으면 내 자식이 없다고, 내 자식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할 수 있는 남자가 저 사람이다. 저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면 소중한 내 아이가 없다고 생각하면 남편이 다시 생각된다고 했다. 나는 역시 과잉 모성애 그녀 답다고 생각했지만 맞는 말이었다. 과거로 돌아가 그를 내 삶에서 지운다며 내 자식이 사라지는 것이다. 아무래도 과거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겠다.
엄마는 엄마의 삶을 살았고 당신 입으로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시지만 순간을 즐기며 살고 있다. 꿈은 꿈속에 놔두고 눈을 뜨면 현재로 돌아와야 한다. 어떤 날은 피 칠갑인 꿈을 꾸고 어떤 날은 이게 꿈이 아니고 현실이었으면 싶은 날도 있다. 하지만 그래봤자 꿈일 뿐이다. 나는 잠옷에 뭍은 꿈의 부스러기들을 툭툭 털어내고 아침으로 먹을 달걀을 삶기 위해 냄비를 꺼낸다. 오늘은 네 번쯤 눈을 뜬 모양이다. 자다 말고 주방에 나와 귤을 먹고 늘어놓은 껍질을 치운다. 늦가을 아침 6시 30분의 거실 창 밖은 아직 어둡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