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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틸 Jan 24. 2023

5. 수채화 같은 슬픔


물감을 묻힐 때는 분명했던 색이,

물통에 붓을 몇 번 휘젓고 툭 털어내면 본래의 색은 사라지고 없다.

물의 농담에 따라 달라 보이는 색처럼 나에게 슬픔은 하나의 색이 아니었다. 

진했다가 연했다가, 

번지는 정도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졌다. 

멸망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걸음마다 몸 안의 슬픔들이 차올랐다 쏟아졌다를 반복했다. 

그리하여 물기를 품은 발자국 수에 맞춰 나는 슬픔과 가까워졌다.     

예정되어 있는 멸망. 


그 멸망을 향해 걷는 일을 멈출 수 없는 자의 슬픔. 

탄생과 동시에 선고된 죽음은 슬픔을 동반한다. 

아무 이유 없이 때때로 찾아오는 수채화 같은 슬픔은 

오래 앓은 지병 같은 것이 되었다.    

 

눈가에 눈물이 가득한 채로 바라보는 생은 항상 얼룩져 있다. 

하얀 도화지에 붓을 갔다 댄 순간부터 시작된 그림은 처음 백지로 되돌릴 수 없다. 

다만 물을 가득 쏟아 연하게 할 수밖에. 

사는 동안 흘린 눈물은 슬픔의 자국을 흐릿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멈추지 않는 눈물은 진한 슬픔을 지우는 희석액이었다.  

   

그러니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않아도 된다. 

지금 울고 있다면 그대의 슬픔은 작아지고 있다. 

멸망은 멀어지고 생의 구간이 늘어나고 있다. 

걸음마다 흩뿌려지는 눈물은 생의 길을 축성한다.    

  

선고된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살아가는 일도 멈출 수 없는 인간의 숙명. 

오랜 지병이 된 슬픔을 품은 채 생을 안는다. 

슬픔을 밟으며 삶을 살아내는 것,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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