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
“야, 기억난다. 네가 백일장 상 받아서 원고 제출해야 된다고 나한테 인쇄 부탁했잖아.”
“아 진짜? 내가 니한테 부탁했었나? 그걸 어떻게 기억해?”
“기억하지. 그때 나도 상 받았었는데, 니 글이 되게 간결하고 담담한데 아빠 이야기여서 좀 감동적이었던 것 같다. 아빠랑 같이 안경 맞추러 간 이야기 아니었나? 그때 니가 나이 드는 거에 대해서 썼던 것 같은데.”
친구는 15년 전 내가 중학교 교내 백일장 대회에서 상을 받았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백일장 입상작은 액자로 만들어져 전시를 했다. 입상자들은 원고를 인쇄해 선생님께 제출해야 했는데, 나는 함께 입상한 친구에게 인쇄를 부탁했었다. 나조차도 기억에서 멀어진 일이다. 대학원 기숙사 생활을 마무리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 방에 걸려있던 액자를 보고서야 다시 떠올렸던 기억이다.
아직도 내 방에는 파스텔로 안경 그림이 그려진 중학교 백일장 입상작이 걸려있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진학하며 글쓰기와는 전혀 관련 없는 삶을 살았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전공과 관련된 영어를 열심히 공부한 편이었다. 대학교 생활 내내 영어만 열심히 했는데, 졸업 시즌이 다가오자 여러 고민이 생겼다.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어떤 일자리를 가져야 할지도 몰라 막막했다. 그래서 어릴 적 방송반 활동을 하며 꿈꾸었던 기자를 준비해보기로 결심하고 언론대학원에 진학했다.
2.
대학원 생활 적응은 쉽지 않았다. 대학교를 다니며 이미 취재 경험을 쌓고, 상당한 독서량과 필력을 가진 동기들 사이에서 수업을 듣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다. 하지만 동기들은 자신의 경험을 기꺼이 나눠주고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도와주었다. 책에서나 보았던 존경할 만한 삶을 실제로 살고 계시는 교수님들과 공부하는 것은 커다란 동기부여가 되었다. 덕분에 내가 언론을 공부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등 나에 대해 충분히 고민해볼 수 있었다.
3.
일기처럼 이것저것 끄적이던 노트가 있었다. 2018년 새해 첫날에 이런 메모가 있었다. “블로그라도 시작해서 글을 써보자. 일단 시작해보자.” 놀라웠던 건 몇 장 뒤 2019년 새해에 적힌 메모였다. 완전히 새로운 다짐인 듯 쓰여있었다.
“블로그를 통해 글쓰기를 시작해보자.”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건 정말 어렵다. 어떤 외부적인 자극이 있거나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라면 더더욱 어렵다. 글쓰기는 나에게 마음속 깊이 품어온 소중한 것이었지만 ‘내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무언가였다.
퇴사 직전 해외출장을 앞두고 정말 바쁜 시기에 들었던 수업이 있다. 평일 수업이라 일주일에 한 번씩 오후 반차를 내서 당일로 서울과 부산을 오갔다. 직업으로 글을 쓰는 분께 객관적인 평가를 받아보고 싶었다. 내가 얼마나 잘 쓰는지 궁금했던 게 아니라 왜 글쓰기가 내 삶에 중요한 문제인지, 내가 글쓰기에 얼마나 진지한지 알아보고 싶었다. 6주간의 수업이 체력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큰 부담이었지만 내적인 에너지가 계속해서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퇴사를 했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작가가 되는 것은 특별한 사람이 이루는 꿈이지만, 글을 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내 메모장에 반복적으로 쓰여있던 새해 목표대로 블로그를 시작했다. 쓰다 보니 인스타그램과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통해 글을 쓰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분명한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매일 아침 일어나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매달 읽고 싶은 책을 정리해서 나만의 한 달 일정을 만들었다. 규칙적으로 글을 썼다. 퇴사 후 1년 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책으로 정리해보고 싶었다.
나조차도 잘 정리되지 않는 나의 글쓰기 열정을 돌이켜 보니 그 시작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어쩌면 백일장 입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인생이 꼬인 건 그때부터였나 보다.
4.
퇴사와 함께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20대를 정리하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3년을 함께 한 10대 친구들과 떠나기로 했다. 가치관이 형성되던 시기를 함께 했던 친구들과 떠난 여행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인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오답노트를 쓰는 사람의 마음처럼 여행 중 20대의 어느 날을 복기해보곤 했다. 여행지에서의 설렘과 함께 20대의 우울한 이야기가 함께 담겼다. 여행을 꿈꾸는 사람에게도, 일상에서 자신의 중심을 잡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모두 공감 가는 이야기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