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지 Oct 31. 2020

하루를 두 번 산 날

여행의 시작

마침 입사 연수까지 시간이 남은 친구와 휴가를 이용해 여행 계획을 함께 세우던 친구들이 있었다. 세 명이서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목적지는 유럽으로 정했다. 이미 유럽을 다녀온 적 있는 두 친구는 내 퇴사 날짜가 정해지자 비행기표를 알아봤고 세 명의 상황이 맞아떨어지는 일정을 세웠다. 나는 약 한 달간 인수인계를 비롯해 각종 작별인사, 책상 정리 등을 마무리했다. 비행기표를 알아보던 친구들은 마침내 괜찮은 가격의 직항 표를 찾아냈다.


퇴근하고서 침대에 멍하게 앉아 항공권 가격비교 사이트를 자주 검색하곤 했다. 가지도 못할 목적지지만 대강의 날짜를 넣어 비행기표를 검색해보는 것이 즐거웠다. 보통은 내 휴가로 시간을 낼 수 없는 장거리 비행이었다. 결제 페이지까지 넘어가는 날이 있을까 상상해보곤 했다.


친구들이 보내준 링크로 결제를 했다. 9월 25일 출발, 10월 24일 도착. 29박 30일의 일정이었다. 돌이켜보니 그 날이 퇴사 당일이었다. 퇴사 후 한 달간 시험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여행 준비에 매달렸다. 아침 일찍 일어나 카페에 갔다. 주요 도시의 유명한 관광지가 무엇인지, 도시 간 이동을 위한 교통편으로 무엇이 있는지, 숙소 위치는 어디쯤이 적합한지 검색하고 노트에 정리했다. 일주일에 한 번 친구와 만나 교통권을 발행하고 숙소를 예약했다. 스터디에 참석한 사람들처럼 도시별 마감 일정을 세워두고 할 일 목록을 하나씩 지워갔다.


출발 3주 전. 대강의 루트를 짰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오스트리아 빈, 잘츠부르크, 이탈리아 베네치아, 로마, 스페인 바르셀로나, 세비야, 포르투갈 포르투, 영국 런던.


출발 2주 전. 숙소 예약을 마무리했다. 물가가 싼 도시에서는 에이비앤비를, 대도시에서는 한인민박 도미토리를 예약했다. 로마와 런던에서는 이마저도 쉽게 구해지지 않아 한참 애를 먹었다.


출발 1주 전. 발권이 빠를수록 할인율이 높은 기차표, 버스표 등을 예약했다. 도시별 이동 수단을 정리하고 저가항공은 상황에 따라 현지에서 예매하기로 했다.


출발 하루 전. 23kg 수화물 규정을 맞추려니 옷을 넣었다 뺐다, 화장품과 세안용품을 공병에 담았다가 뺐다를 반복했다. 소매치기 방지용 자물쇠, 화장솜, 믹스커피와 각종 차 티백, 일기장용 노트, 장시간 이동 중에 볼 책, 각기 다른 용도의 모자까지 챙기고 보니 한 번이나 쓸까 말까 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넣고 빼다를 반복하다 기진맥진해 잠들었다.


새벽 비행기가 인천에서 출발하는 일정이라 하루 전날 공항 근처의 숙소를 잡았다. 출발 직전까지도 서울에 있는 친구를 만나고 가보고 싶었던 책방을 들리며 미션을 완수해야 하는 사람처럼 일과를 알차게 채웠다. 각자의 일정을 마치고 온 우리 셋은 전날 저녁 숙소에서 만났다. 출발을 하루 앞두고도 우리가 진짜 여행을 가는 건지 실감 나지 않았다.




15년을 알고 지낸 친구들이었는데 우리는 다 같이 1박 이상의 여행을 간 적이 없다. 첫 여행은 입사한 첫 해 두 명이서 떠난 대만 여행이었다. 세 명이 함께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2003년, 6학년 겨울방학. 중학교 내신을 대비하기 위해 다니기 시작했던 단과학원에서 우린 만났다. 친한 친구가 겹쳐 5명의 친구가 자주 어울렸다. 가정환경도, 성격도, 관심사도 비슷했던 우리들은 금방 친구가 되었다. 학원을 마치면 서로의 집에 몰려다니며 하루 종일 시간을 함께 보냈다. 2004년, 대형 기획사에서 야심 차게 준비한 2세대 아이돌인 동방신기가 데뷔하며 우리는 더 끈끈해졌다. 이들이 출연한 음악방송, 라디오, 예능, 드라마까지 챙겨봤고 팬클럽에 가입했다. 부산에서 열리는 각종 콘서트에 참여하기 위해 몇 시간이고 줄을 섰고 밤을 새기도 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를 생각하면 나는 중학교 3년의 시기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맥도널드, 배스킨라빈스의 신메뉴를 사 먹는 게 가장 큰 행복이고, 동방신기 쇼케이스를 보기 위해 서울에 다녀오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편을 가르지 않았고 서운한 이야기는 직설적으로 이야기해서 풀었다. 10대의 우리는 스물아홉이 되어있었다.


서로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결혼을 했고 새로운 시도를 앞두고 있었다. 친구들이 추억하는 10대는 어떨지 궁금했다. 여행지에서 만날 멋진 풍경만큼이나 친구들과 나누게 될 이야기가 기대됐다. 이런저런 기대로 잠을 뒤척이다 공항으로 출발했다.


0925+1. 유럽 여행의 일기장에 쓰인 날짜다. 휴대전화 메모장에 날짜를 기입하고 그날 다녀왔던 곳, 친구와 한 이야기, 만난 사람들, 먹은 음식 등을 기록했다. 유럽행 비행기를 탔던 날은 9월 25일. 비행기에서 하루를 보냈다. 같은 날짜인 0925+1은 유럽에 도착한 첫날이다. 14시간을 비행해 날아가면서 날짜 변경선을 지났고 하루를 더 얻게 되었다.


나는 <어바웃 타임>이라는 영화를 열 번도 넘게 봤다. 영화관에서도 보고, 다운받아서도 보고, 잠이 오지 않는 저녁, 틀어놓고 자기도 했다. 영화 속 음악이 좋았고, 등장인물에게선 따뜻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런던과 작은 시골 도시를 배경으로 한 영상도 아름다웠다. 로맨스 영화지만 마음에 와 닿는 주제도 있다. 내가 살아가는 하루의 소중함을 느끼는 것.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남자 주인공에게 같은 능력을 가진 아버지는 조언한다. 하루를 똑같이 두 번 살아보라는 것. 처음 하루는 평소처럼 보내고 두 번째 하루는 그 속에서 놓치고 지낸 즐거움을 찾아보라는 것이었다. 간단하지만 하루를 살아가는 명확한 지혜를 얻을 수 있었다.


<어바웃 타임>의 도시, 팀과 메리가 처음 만난 미술관, 함께 출근하던 지하철, 런던 곳곳에서 인생 영화인 <어바웃 타임>의 흔적을 찾으며 여행을 마무리할 예정이었다. 모니터 화면 속 비행기의 위치가 헝가리 상공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나는 이 여행을 통해서 하루의 의미를 찾게 될까.

이전 01화 인생이 꼬인 건 어쩌면 백일장 때문일 거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