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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지 Oct 31. 2020

여행의 준비운동

헝가리 부다페스트

프로모션으로 싼 가격에 나온 직항 비행기가 폴란드 항공사였다. 출발지와 도착지를 다르게 설정하니 헝가리로 입국해 런던에서 출국하는 일정의 가격이 가장 쌌다. 여기에 유럽을 두 번 다녀왔고 휴가를 이용해 일주일간 함께 할 친구, 유럽을 한 번 다녀왔고 한 달 내내 함께 여행할 친구, 그리고 유럽을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나. 세 명의 상황을 고려해 루트를 짜야했다. 야간 이동, 도시 간 잦은 이동 등 쉽지 않은 여정이 될 예정이었지만 모두 만족할 만한 경로를 만들어냈다.


첫 여행지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였다. 친구가 이미 다녀온 곳이라 지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어디에 숙소를 잡으면 주요 관광지를 다니기 편한지 기억하고 있었다. 첫 여행지가 부다페스트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친구를 가이드처럼 믿고 따랐다. 친구는 중학생 때부터 길을 찾고 돈을 관리하는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다섯 명이서 어울렸는데 나머지 네 명의 머리를 합친 것보다 친구 혼자 하는 편이 빨랐다. 그래서 낯선 곳을 갈 때도 친구와 함께면 늘 든든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다섯 멤버의 첫 당일치기 여행은 시외버스를 30분쯤 타고 가면 도착하는 교외의 한 놀이공원이었다. 부산의 가족들이 자주 나들이를 가는 곳이라 우리 모두에겐 익숙한 곳이었다. 중학교 2학년에게 자유이용권의 가격이 부담되었지만 언젠가 우리끼리 가보자며 의지를 다지던 곳이었다.


내 생일을 앞두고 무얼 할지 왜 그러는지는 알려주지도 않고 일요일 시간을 빼놓으라고만 했다. 서프라이즈를 해주려는 친구들의 거짓말이 뻔히 보였다. 당시 우리들의 생일파티는 당사자가 다 알지만 모른 척해주는 서프라이즈여야만 했다. 정성스럽게 매번 다른 거짓말을 생각해냈다.


시외버스 시간을 알아보고 예약하고 돈을 모았을 친구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놀라는 척했다. 시간에 맞춰 터미널에 도착하고 방향을 확인하여 표를 발권한 뒤 우여곡절 끝에 놀이공원에 도착했다. 우리끼리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이 났다.


친구들이 느꼈을 성취감과 해방감이 내게도 전해졌다. 놀이기구를 전혀 타지 못하는 몇몇 친구는 멀미에 시달리다 벤치에 뻗었다. 그 바람에 우리의 일탈은 오래가지 못했다. 몸이 따라주지 않는데도 함께 해준 친구들이 고마웠다. 결국 자유이용권을 끊고선 놀이기구를 타다 친구들을 보살피다를 반복했다. 그래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한 기억으로 남은 생일이다.


우리는 그랬던 것 같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 보자고 마음을 모았다. 각자의 성격은 그다지 외향적이거나 도전적인 편이 아니었는데 함께 있을 때면 다들 다른 자아가 나왔다. 중학교 2학년이라는 나이가 그런 나이기도 했지만 주저하거나 빼는 일이 없었다.


불꽃 축제가 처음 열리던 해 수많은 인파를 뚫고 구경을 갔고, 시험기간이면 학원에서 자습을 마치고 밤늦게 돌아오다 수다가 끊이지 않아 새벽 1시를 넘기기도 했다. 집에서 안 들어오냐는 전화를 몇 번이나 받고선 헤어졌다. 그렇게 놀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공부 스트레스도, 세상이 끝날 것처럼 괴로웠던 일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돌이켜 보면 그때의 추억이 차곡차곡 쌓여 인생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힘이 됐다.




헝가리는 다른 유럽 지역에 비해 물가가 싼 편이다. 유럽 각 지역별로 매장이 있는 브랜드를 통해 지역별 물가를 비교했다. 슈렉팩으로 불리는 유명한 팩이 125g에 13,000원 정도였다. 2만 원인 한국 원가보다도 쌌고 제조국인 영국보다도 몇 천 원 싼 가격이었다.


예산 관리를 위해 조식은 간단하게 먹고 점심과 저녁 중 한 끼는 먹고 싶은 걸 먹자고 했다. 헝가리에서는 세 명이서 함께 식당을 가면 우리의 하루 식비 안에서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요리 몇 가지를 시켜 풍족하게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풍족하게 먹은 음식으로 오히려 탈이 났다.


나는 원래 밀가루 음식을 잘 소화시키지 못한다. 면요리와 빵을 좋아하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면 밀가루 음식을 먹다 자주 체했다.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된 부다페스트의 둘째 날. 우리의 일정은 아침 온천을 갔다가 팔라친타라고 하는 헝가리 전통 음식을 먹은 뒤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볼 참이었다. 


팔라친타는 팬케이크로 면을 만들고 양념을 더해 파스타처럼 먹는 음식이다. 우리가 갈 곳은 여행 프로그램에 맛집으로 소개된 곳이고 블로그 평도 좋아 기대가 컸던 곳이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 도착했는데 가게는 한산하고 직원들은 불친절했다. 방송에 나왔던 음식으로 각자 다르게 시켰는데 외양도 맛도 우리가 기대한 것과 달랐다. 거기다 팬케이크로 만든 파스타면과 부담스러운 기름까지 소화하기 버거운 맛이었다.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마침 부다페스트의 저녁은 쌀쌀했고 재킷을 걸쳤지만 짧은 원피스를 입었던 나는 컨디션이 엉망이 됐다. 시차 적응으로 피곤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체기와 몸살 기운이 있었던 것 같다.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야경을 보는데 별 감흥이 없었다. 어제 오후에 도착해 오늘이 공식적인 첫 일정이었다. 사진을 찍고 구경하기에도 모자라는 시간에 온 신경이 다른데 가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다. 몸이 아파서라기보다는 하루를 망쳤다는 생각에 속상했다. 친구들의 여행에도 민폐를 끼친 기분이었다.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다 숙소로 돌아왔다. 소화제를 먹고 잠들었다. 다행히 따뜻한 이불속에서 푹 자고 일어나니 한결 편안해졌다.


다음날 기운이 들고서 생각해보니 왜 그랬나 싶었다. 몸이 좋지 않다고 말했으면 친구들과 잠시 따뜻한 카페에 들어가 쉬어가거나 빨리 숙소로 돌아오는 등 함께 방법을 찾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몸이 아픈 것도, 빨리 기운을 차리는 것도, 내 기분에 책임지는 것도 모두 내 몫이라는 생각에 오히려 모두를 불편하게 한 저녁이 되었다. 함께하는 친구들이 있어 여행이 더 풍족하고 든든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날 이후로 마음을 달리 먹기로 했다. 뜻대로만 되지 않는 것이 여행의 일상이기에 내 감정을 솔직하게 나누고 도움을 청하고자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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