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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지 Oct 31. 2020

레몬맥주의 은유

각국의 주류 문화

여행을 하다 보면 우연히 마주치는 감동의 순간이 있다. 여행을 떠날 땐 런던에서 관람할 뮤지컬, 로마의 콜로세움, 부다페스트의 야경과 같은 거창한 것들을 꿈꿨다. 막상 도착해보니 여행의 일상에서 만나는 작은 기쁨들이 긴 여운으로 남았다. 그중 하나가 각국의 주류 문화이다.


가고 싶은 여행지를 정리하는 것만큼이나 가야 할 식당을 정리하는 것은 우리의 중요한 일과였다. 여행 중 함께한 주류들은 매번 식사를 더 기억에 남게 해 주었다. 각 나라마다 식사 문화와 함께하는 주류가 있었다. 헝가리의 로제 와인, 스페인의 샹그리아, 오스트리아 양조장의 맥주 등 다양한 주류를 경험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세 가지 술을 정리해보았다.


첫 번째는 이탈리아의 식전주 스프리츠다. 주황색 탄산음료처럼 생긴 이 음료는 얼음과 오렌지 슬라이스를 곁들여 나온다. 외양부터 식욕을 돋운다. 이탈리아에 다녀온 적 있는 친구가 꼭 마셔보라며 추천했다. 베네치아에서 처음 접했는데 이후 이탈리아 여행에서 우리 주문 내역에 빠지지 않는 메뉴가 되었다.


숙소에서 마시기 위해 마트에서 구입하기도 했다. 묶음으로 판매하는지라 여러 개 중 마시지 못한 병은 배낭에 꽂아서 들고 다니기도 했다. 길을 가다 우리를 본 이탈리아 사람이라면 술에 진심인 관광객으로 보았을 것이다.


두 번째는 포르투갈에서 만난 그린 와인이다. 와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지만 레드와인과 화이트 와인이 있다는 정도는 알았다. 식당에서 와인을 시킬 때도 육류는 레드와인과, 생선요리는 화이트 와인과 어울리는 경우가 많다는 조언에 따라 달리 시켜보기도 했다.


포르투갈의 첫 저녁 식사는 도루 강 근처의 식당이었다. 한국 관광객에게 유명한 곳이었는데 맛도 맛이지만 메뉴가 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을 법한 조리법이었다. 식사류로 두 가지를 시켰는데 하나는 자박자박한 국물에 쌀 요리가 리소토처럼 나오고 새우와 각종 조개류가 얼큰한 맛을 내는 요리였다. 다른 하나는 삶은 문어에 올리브 오일로 조리한 각종 야채가 따뜻한 뚝배기에 담겨 나오는 요리였다. 마침 따뜻한 음식이 간절했다. 갑자기 뚝 떨어진 기온에 으슬으슬 추웠다. 날씨는 흐리고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추가로 화이트 와인을 시켰는데 주문을 받던 사장님이 다른 와인을 권했다. 우리가 시키려던 메뉴와 가격은 비슷했는데 ‘그린 와인’이라고 설명했다. 포르투갈에서만 생산되는 와인이고 우리 메뉴와 가장 잘 어울린다며 추천했다. 사장님을 믿고 메뉴를 바꾸었는데 차가운 온도의 그린 와인은 따뜻한 해산물 요리와 정말 잘 어울렸다. 청량한 향이 나면서도 씁쓸한 뒷맛이 요리의 맛을 배가시켰다.


그날 이후 그린 와인에 푹 빠져 식사와 함께 곁들였다. 마침 에어비앤비를 이용했던 터라 마트에서 고기와 그린 와인을 사 와 스테이크를 해 먹었다. 그때 함께 마셨던 와인도 식당에서 마셨던 와인만큼이나 만족스러웠다. 결국 그린 와인을 사서 한국으로 들고 왔다. 제한된 캐리어 무게로 그린 와인을 사 오느라 포기해야 했던 다른 기념품들이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 봐도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마지막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마실 수 있었던 라들러다. 립 요리를 먹을 때도, 돈가스와 비슷한 슈니첼을 먹을 때도, 한인마트에서 산 짜장라면을 해 먹을 때도 늘 함께한 레몬 맥주이다. 식당에서 주류 메뉴에 표기된 라들러가 상표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맥주의 한 종류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라거 맥주류와 레모네이드를 섞은 것으로 자전거 타는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독일어로 라들러는 자전거 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라거 맥주보다 알코올 도수가 낮다.



반주를 늘 곁들이다 보니 여행 후반부 사진을 보면 얼굴이 약간 부어있다. 여행의 피로가 누적되어 얼굴에 나타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헐렁하던 바지가 점점 딱 맞았던 걸 생각하면 반주의 대가였던 것 같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로는 낮술을 마시거나 반주를 즐기지 않는다. 대신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하루의 즐거움을 더해주었던 주류들이 생각난다.




특히나 레몬맥주는 유럽 전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어 여행 내내 함께했다. 카사노바가 다녔다는 카페에서는 한잔에 1만 5천 원이 넘는 커피도 마셨고 가성비가 좋다는 어느 식당에서는 4만 원에 가까운 스테이크도 시켰다. 하지만 비싼 가격이 맛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레몬맥주는 어느 도시에서나 5달러 이하로 마실 수 있었다. 언제나 확실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처음 맛보는 음식의 풍미를 더해주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소소한 즐거움을 선사했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여행에서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게도 해준다.


삶의 의지를 북돋워주는 건 의외로 작은 행복의 순간일 때가 있다. 주말 아침에 마시는 커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메모하고 싶은 책, 길을 걷다 마주하는 파란 하늘 등. 별 기대 없이 만날 수 있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라는 것이 있다. 여행이 그리울 때 그런 생각을 한다. 특정 순간으로 기억되는 여행의 특별한 순간은 의외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었다는 것. 인생의 즐거움은 레몬맥주에만 있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레몬맥주는 인생의 은유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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