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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지 Oct 31. 2020

세비야의 어느 밤

스페인 세비야

열쇠는 내가 쥐고 있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여행 중 숙소 앞에서 자주 한 생각이다. 유럽의 현관은 대부분 열쇠를 쓴다. 한인민박에서는 열쇠 분실이 많아 보증금을 받기도 한다. 열쇠를 파우치 안쪽에 잘 넣어두고 다녔다. 열쇠를 분실하지 않기 위한 노력만큼이나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문 열기’였다. 어떤 곳에서는 대문과 중문, 현관까지 3개의 문을 열어야만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가장 큰 난관은 스페인 세비야의 에어비앤비였다. 대문과 현관이 있는 곳이다. 호스트는 숙소를 예약했을 때부터 몇 시쯤 도착하는지, 어떤 교통편을 이용하는지, 공항에서 숙소로 오는 방법은 무엇인지 미리 연락해 섬세하게 챙기고 알려주었다. 약속시간에 맞춰 나타난 호스트는 체크무늬 셔츠에 수더분한 인상을 가진 스페인 남자였다. 메신저 말투만큼이나 친절하고 영어도 잘했다.


대문과 현관은 어떤 열쇠로 열면 되는지 직접 시범을 보이며 설명해주었다. 열쇠를 받아 들고 사진에서 보았던 그대로의 숙소에 감탄하며 호스트와 작별 인사를 했다. 오후에 도착한 지라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식사를 하고 간단히 주변을 둘러보았을 뿐인데 숙소에 돌아오니 깜깜한 밤이 되었다. 가져온 열쇠로 대문은 수월하게 열었고 현관 앞에 도착했다. 복도 조명을 알아두지 않아 휴대전화 플래시를 켜고 현관 앞에 섰다. 한 층에 세 집 정도가 있는 다세대 주택이었는데 우리가 문 앞에서 내는 말소리가 옆집으로 다 들릴 정도로 가까웠다.


늦은 시간 민폐가 될까 잔뜩 긴장하며 열쇠를 끼워 넣는데 열쇠가 돌아가지가 않았다. 거꾸로 넣었나 싶어서 열쇠를 다른 방향으로 넣어도 마찬가지였다. 복도에는 열쇠를 넣었다 뺐다 하는 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이제 민폐는 둘째치고 이 시간에 숙소에도 못 들어가는 게 아닐까 싶어 식은땀이 약간 났다. ‘호스트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까지 생각하던 와중에 앞집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덩치 큰 앞집 아저씨가 창문을 열고 손짓으로 무어라 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는 데다 소리를 질러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다른 옆집 사람도 놀라겠다 싶어 아저씨를 진정시키고자 “I cannot speak Spanish..”를 소심하게 말해보았지만 아저씨는 스페인어로 계속해서 내달렸다. 문은 안 열리고, 아저씨의 고함소리는 폭주를 하고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게 아닐까’, ‘오늘 밤은 무사히 숙소에 들어갈 수 있을까’ 온갖 생각에 미쳐버리겠다 싶은 순간에 친구가 말했다.


“야 잠깐만. 저 아저씨가 문 여는 거 도와주려는 거 같은데.”


경계를 늦추니 아저씨가 집에서 나와 딸깍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가 열려던 방법이 맞았는데, 힘이 좀 더 필요했던 것이다. ‘이 방향으로 여는 게 맞나’, ‘열쇠가 제대로 들어갔나’, ‘두 번을 돌리는 건가’하며 주저했다. 열쇠를 오른쪽으로 두 번 돌리니 열렸다. 호스트가 알려줬던 방법 그대로였다.


연습을 해봐야겠다 싶어, 친구가 숙소로 들어가고 아저씨가 열었던 방법으로 열쇠를 돌려보았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문이 부서질 것처럼 안 열리던 자물쇠가 딸깍하고 열리는 것이다. ‘이 방향이 맞다’, ‘이 문을 열어야 하는 사람은 나다’라는 생각으로 온 힘을 다해 돌리니 정말 문이 열렸다.



여행에서는 모든 문제를 직접 해결해야 한다. 감기가 심해져 밤새 콧물이 나 잠을 설쳤던 어느 숙소에서는 자기 전 비타민을 먹고, 머리맡에 휴지와 마실 물을 준비해두고 잤다. 지금 당장 내 감기를 낫게 해 줄 약을 찾을 수 없었고 내일 아침에는 예약해 둔 투어가 있었다. 야간 버스를 타고 새벽 일찍 도착한 낯선 도시의 경유지에서는 화장실과 환승 시간 전까지 머물 곳을 찾아내야 했다. 근처 지하철역 화장실을 다녀오고 터미널 내 카페를 찾아 따뜻한 음료를 시켰다. 전날 미리 사 둔 빵과 함께 아침을 먹으며 환승 버스를 기다렸다.


1인분의 삶이 간절하게 그리울 때가 있었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하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여행을 통해 1인분의 삶조차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럴 때 힘이 되는 건 조금만 더 힘을 내면 된다는 것이다. 세비야의 어느 등골 서린 숙소 앞에서 느낀 것처럼 열쇠는 나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게 열릴지 말지 고민하지 말고 내 악력을 믿고 문이 열릴 때까지 힘을 내서 열쇠를 돌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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