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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지 Oct 31. 2020

여행의 온도를 기록하는 법

우편제도

“언니, 여행 가면 저 엽서 써주세요.”


여행 전 날, 한국에서의 마지막 저녁은 고기를 먹기로 했다. 회사 생활 1년 차에 해외 출장을 함께 간 동생과 약속을 잡았다. 6개월간의 짧은 계약이었는데 바쁜 시기에 큰 힘이 되어주어준 친구였다. 나와는 4살 차이가 났는데 어른스럽고 똑 부러졌다. 마침 동유럽에서 교환학생도 해본 터라 여행에 대한 소소한 팁을 나눌 수 있었다.


“엽서? 우체국 찾아다녀야 되지 않아?”


“아니에요. 보통 기념품 파는 곳에서 엽서랑 우표 같이 팔아요. 우체통에 넣으면 되는데 숙소 근처에 다 있을 거예요.”


생각보다 간단했다. 동생도 엽서를 보내보았다며 영문과 국문 주소를 함께 쓰면 된다는 조언까지 덧붙였다. 각 나라별로 보낸 엽서를 받아보면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여행을 응원해준 친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엽서를 보내면 선물이 될 것도 같았다. 동생의 주소를 받아 들고서 몇몇 친구들에게 주소를 알려달라고 연락했다.




그렇게 나라별 엽서 보내기는 여행 내내 나만의 미션이 되었다. 후배의 말대로 우체통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설령 안 보이더라도 우체국을 구글 맵에 검색하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길가다 보이는 우체통의 위치를 알아두었고 기념품 가게에서는 우표를 샀다. 도시를 떠나기 전날에는 그 도시에서 좋았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엽서에 썼다.


세 번째 나라였던 이탈리아에 도착하기 전까지 엽서가 한 군데도 도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반신반의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에서 특급으로 보낸 엽서가 보낸 지 거의 일주일 만에 집에 도착했다. 그 후로 헝가리와 이탈리아에서 보낸 엽서도 무사히 도착했다. 스페인에서 보낸 엽서는 네 군데의 수신처로 보내졌는데 한 군데도 도착하지 않았다. 포르투갈과 영국에서 보낸 엽서는 내가 한국에 도착한 뒤에야 차례차례 도착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6개국에서 총 17개의 엽서를 보냈고, 그중 13개가 도착했다. 스페인에서 보낸 엽서를 제외하면 모든 나라에서 보낸 엽서가 미국으로, 서울과 부산으로 제대로 도착했다. 봉투에 넣지도 않고 수기로 주소를 써서 우체통에 집어넣을 때는 별 기대가 없었다. 중간에 분실되거나 엉뚱한 곳으로 배송되는 등 사람의 실수가 있을 법한 시스템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싸게는 2,000원, 비싸게는 4,000원가량하는 국제 우표는 제 값을 톡톡히 해냈다. 우편제도가 오랜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를 실감했다.


우체통을 관찰하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포르투에서는 우체부 동상과 함께 서있는 우체통이 인상 깊어 같이 사진을 찍었다. 대부분 빨간색의 네모 박스에 Post가 영어로 새겨져 있었는데 세비야에서 만난 우체통은 원통 모양의 노란색이었다.



나는 손편지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평소에는 우표를 붙이고 편지를 부칠 일이 잘 없다. 유럽에서 한국으로 날아오는 엽서는 여행의 설렘을 다시 느끼게 했다. 당시 들뜨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고 아쉬웠던 감정의 온도가 담겨 있었다. 이제 막 도착한 부다페스는 어떤 도시인지, 야간 기차 탑승을 앞두고 어떤 기분인지, 집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 얼마나 시원섭섭했는지 당시의 기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한 달 전 여행을 하고 있던 나와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여행할 당시에는 엽서를 부치는 것이 버거울 때도 있었다. 기념품 샵은 늘 있었지만 우표를 사기 위해 근처의 상점을 몇 군데나 들러야 했다. 엽서를 미리 써두지 않았을 때는 이동하는 날 아침 우체통에 다녀오느라 혼자 뛰어다니기도 했다. 클림트, 에곤 쉴레, 고흐와 같은 작품이 있는 도시에서는 오리지널 작품이 담긴 엽서를 사기 위해서라도 미술관을 다녀왔다. 친구들과 가족들은 엽서가 몇 군데에서 도착하지 않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겠지만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지금도 한 번씩 엽서를 꺼내보다. ‘이 엽서 샀던 미술관에 예쁜 그림들이 많았지’, ‘우표 건네주던 직원이 진짜 친절했는데’, ‘기차 타기 직전에 우체통에 넣고 오느라 긴박했어’하는 기억이 떠오른다. 미션 하는 기분으로 고생했던 탓에 엽서를 보냈던 상황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래도 여행의 기억이 흐릿해질 때쯤 꺼내보는 엽서가 그 도시에서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상기시켜준다. 그때마다 행복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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