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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지 Oct 31. 2020

고흐의 그림을 보다가

영국 런던

여행을 하다 보면 도미토리에서, 우연한 기회로 합석한 자리에서 다녀온 여행지에 대한 팁을 공유할 때가 있다. 신기하게도 런던에서 살고 있거나 런던에 다녀온 여행객을 많이 만났다. 교통권으로 오이스터 카드를 꼭 사라, 뮤지컬은 데이시트를 이용해서 봐라, 마켓별 특성은 이렇다 등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중 미술관에 대한 조언도 있었다. 런던은 대부분의 미술관이 무료이니 마음껏 둘러보라는 것이었다. 런던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고 있다는 한 언니는 주말마다 시간을 내서 자주 방문한다고 했다. 마침 숙소에서 도보 거리로 내셔널 갤러리가 멀지 않았다. 런던에 도착한 첫날의 일정은 그림 보러 가는 것으로 정했다.


내셔널 갤러리에는 유명한 작품이 많지만 단연 인기 있는 곳은 세잔, 모네 등 인상파 분야이다. 그 날 일정이 애매해서 미술관을 둘러보는 동선을 효율적으로 짜야했는데 인상파 작품은 꼭 보고 싶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꼭 보고 싶었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고흐는 나에게 의미가 있는 예술가이기도 했다.


언젠가 슬럼프를 겪던 내게 친구가 엽서가 선물했다. 뒷면에는 고흐가 남긴 문장이 있었다. 아마 친구가 내게 들려주고 싶었던 말이었던 것 같다.


“열심히 노력하다가 갑자기 나태해지고, 잘 참다가 조급해지고, 희망에 부풀었다가 절망에 빠지는 일을 또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계속해서 노력하면 수채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그 속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야겠다.”


비범한 작품을 남긴 예술가조차 좌절하고 다시 시작하는 과정을 매일같이 겪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메신저 배경화면에 설정해두고 무기력한 기분이 들 때마다 고흐의 조언과 도움을 주고 싶어 했던 친구의 마음을 떠올렸다.




인생에는 가끔 노잼 시기가 찾아온다. 빠져나오려고 애쓸수록 모든 것이 다 의미 없이 느껴진다. 그럴 때는 에너지가 충분히 차오를 때까지 시간을 보내는 편이다. 몸은 편하지만 정신은 괴로운 이 시기에 떠올리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2018년 우리나라 사찰 8곳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뉴스를 보고 그중 가장 가까운 곳으로 템플스테이를 예약했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곳에 방문해 보고 싶었고 주말을 이용해 휴가 기분을 내고 싶었다.


보통 템플스테이는 체험형과 휴식형으로 나뉘는데 나는 1박 2일 휴식형을 선택했다. 책도 읽고 영화도 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다 올 생각이었다. 별다른 기대 없이 아이패드에 영화를 다운로드하여 들고 갔다. 생각보다 절은 아담했다. 저녁 식사는 사찰에서 키운 매실로 담근 고추장에 나물과 함께 먹는 비빔밥이었다. 몇 숟갈 먹지 않고도 허기가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찰 특유의 호젓한 분위기에 기분도 맑아졌다.


스님과의 차담은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진행됐다.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 템플스테이에 오게 된 이유를 소개했다. 스님께서 먼저 이야기를 해주시고 고민이 있는 참가자는 스님과 말씀을 나누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욕심에 관한 스님의 정의였다.


“열심히 공부해서 1등 하겠다는 건 욕심이에요, 아니에요?”


(음…)


“그건 욕심이 아닙니다.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으면서 1등 하겠다는 게 욕심이지요.”


차담을 마치고 그날 스님께 들었던 이야기를 메모해두었다. 한 번씩 메모를 꺼내볼 때마다 유독 스님의 ‘욕심론’에 공감이 갔다. 언제부턴가 냉소의 태도를 키워왔다. 누구나 인생의 진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는데 나는 고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꿈에 그리던 고등학교에 합격했는데 막상 입학해보니 친구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 전교 성적으로도 10등 이하로 내려간 적이 잘 없었는데 반에서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성실과 노력으로 쌓아 올린 세상이 모래처럼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돌이켜보면 전국을 단위로 한 모의고사에서 상위 10퍼센트의 성적이었으니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시야가 좁아졌다. 당시 자존심이 상해 친구들에게 성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고민이 있어도 없는 척, 하고 싶은 게 있어도 관심 없는 척했다. 솔직함을 방패 삼아 살아왔는데 냉소라는 창을 들고서 나를 찔러댔다.


20대가 되어보니 누구나 좌절을 겪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좌절로 인해 성장하고 견문이 넓어지는 기회로 삼는 사람도 많다. 고등학생 때의 콤플렉스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마다 냉소의 감정을 꺼내 들었다. 무기력한 기분이 들 때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스님의 욕심론을 듣고 보니 내 세상이 나를 배신한 게 아니라 내가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분수를 알며 살자’는 자기 객관화가 아니라 가지지 못한 것만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다 보니 내가 열심히 일구어온 것들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지 못했다. 내가 이룬 작은 성취에 기뻐할 줄 모르고,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주변 사람들의 애정 어린 관심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가끔 길을 잃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면 스님의 말씀을 떠올린다.



글을 쓰는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 박사도 같은 말을 한다. 나쁜 생각이 들었을 때 생각을 생각으로 멈추는 것은 어렵다고 한다. 이럴 때는 탐색모드를 행동 모드로 바꾸어야 한다. 잡생각이 많아지만 빨래를 하거나 청소를 하는 것. 회사에서는 계단을 다섯층 정도 올라가는 것 등이다. 우리 뇌는 두 가지를 한 번에 못하기 때문에 고민을 하든지 움직이든지 한 가지에만 집중하게 된다.


여행을 다녀와서도 고흐의 그림은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럼에도 무기력은 어쩔 수 없는 감정이라 예기치 않게 찾아와 내 일상을 휩쓴다. 그럴 때는 충분히 겪고서 자연스레 사라지도록 두는 편이다. 작은 행동을 실천으로 옮기다 에너지가 충분히 채워지면 다시 힘을 내 일상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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