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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지 Oct 31. 2020

하루 2만보를 걸으면 생기는 일

이탈리아 로마

“우리 오늘 얼마 안 걸었네. 만 오천보밖에 안된다.”


친구들과 여행 중에 자주 했던 대화다. 평소에는 하루에 5000보 걷기도 힘든데, 여행을 하면서는 2만 보를 채웠다. 숙소는 이동수단과 가깝게 잡는 것을 최우선 기준으로 했고, 대부분의 목적지에 대중교통과 도보를 이용했다. 다행히 셋 다 걷는 것을 좋아했다.


회사를 다닐 때도 자주 걸었다. 저녁을 먹고 집 앞 공원에서 한 시간씩 걸었다. 걷지 않으면 낮 시간 동안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무언가 가시지 않는 찝찝한 마음, 멍한 감정 상태를 털어내기 위해 걸었다. 회사에서 집까지도 자주 걸어왔다. 지하철역으로 세 정거장 정도의 거리인데 도보로 한 시간이 채 안 걸렸다. 명확히 잡히지 않는 고민을 털어버리는 것보다 50분을 걷는 게 훨씬 쉬웠다. 목적지는 명확하고 거리는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동안 걷다 보면 만보가 되었다. 산책은 평일을 버티는 큰 힘이 되었다.




여행을 하면서도 걷기의 힘을 자주 느꼈다. 걷기가 좋은 이유는 하루 종일 걷고 숙소로 돌아와 적당한 피로감으로 숙면을 취할 수 있다는 점이다. 빡빡한 일정에 지치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도 많이 걷고 나면 수면의 질이 올라가고 다음날 기운도 빨리 회복됐다.


또 다른 이유는 여행의 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바람의 온도, 현지인과 관광객이 뒤섞인 거리에서의 대화, 햇볕이 쨍쨍한 파란 하늘 등 여행의 감각이 예민하게 살아난다. 걷기를 통해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을 남긴 곳은 로마이다.


2019년 유럽은 폭염으로 끔찍한 여름을 겪어냈다. 10월 초가 되어서야 초여름 날씨가 되었다. 밖으로 나갈 수 조차 없는 더위에 유럽 사람들은 여름휴가를 미뤘다. 때문에 우리가 로마에 도착한 시점이 성수기의 절정이 되었다. 어쨌든 하루 종일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맑고 선선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반팔티에 샌들 차림으로 많이도 걸었다.


이탈리아에서 소매치기를 당한 관광객들의 다수가 지하철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경고를 마음에 새기고 바티칸으로 이동하는 아침 이외에는 도보로 다니기로 했다. 전부 계산해본 건 아니었지만, 여행을 마칠 때쯤 돌이켜 보니 어느 관광 지건 숙소로 돌아오는데 도보 40분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로마 걷기 여행이 시작됐다.



로마는 첫인상이 좋았던 도시가 아니었다. 거리 곳곳에서 필름 카메라 감성이 느껴졌던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시작된 여행은 편리하고 친절한 오스트리아 비엔나와 잘츠부르크로 이어졌고, 작지만 볼거리와 맛난 음식이 많은 베네치아를 거쳐 로마에 다다랐다. 그전까지는 비교적 관광객의 밀도가 높지 않거나 크기가 작은 도시들이었다. 유럽 여행의 매운맛을 본격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로마 도착을 앞두고 신발끈을 조여매는 마음이 되었다.


두려움을 안고 시작된 로마여행은 콜로세움에서 베네치아 광장으로, 바티칸에서 판테온으로, 트레비 분수에서 스페인 광장으로 이어지는 거리를 걷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굳이 먼길을 찾아 에스프레소를 마셨고, 길을 가다 만나는 각양각색의 젤라토와 티라미수를 맛보았다. 잔뜩 쫄아서 도착한 로마는 아름다운 속살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17,532보. 29,306보. 23,546보. 19,787보. 20,771보.



로마를 여행할 당시 휴대전화 어플에 기록된 걸음수다. 다른 도시보다도 걸음수가 많은 편이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는 말처럼 골목 구석구석을 걷다 보니 도시가 좋아졌다. 잔뜩 긴장하며 도착했던 로마의 테르미니역은 가장 떠나기 아쉬웠던 역으로 기억된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봤던 노을 지는 분홍색 하늘, 여름 바람과 함께 불어오던 거리의 버스킹,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난 고대 유적지의 전경 등 여행의 낭만을 모두 압축해 놓은 그때의 기억은 쉽사리 잊힐 것 같지 않다.


만보기 어플에서 포인트를 모아 커피 한 잔을 마시려면 5,740 캐시가 필요하다. 574,000걸음을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 평균 하루 2만 걸음을 걸었을 때 한 달이면 60만 걸음이다. 여행을 다녀와서 채워진 포인트를 사용해 커피를 사마셨던 날이 아직 기억난다. 자주 마시던 4,100원짜리 커피인데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커피 한 잔이 내가 적립한 정신적 자산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하루 2만보만 걸으면 내 인생의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 물론 여행을 다녀와서 1만 보도 안 걸을 때가 많다. 그래도 내 기분을 믿지 않고 산책의 힘을 믿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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