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로 향하는 야간열차에서
힘든 일과가 있는 날에는 ‘조금만 버티자. 밤에는 집에 가서 잘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버틸 때가 있다. 잘 풀리지 않는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할 때도 끊임없는 야근이 이어질 때도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버티곤 했다. 다른 건 다 포기해도 잠은 포기하지 못하는 편이다.
여행을 다닐 때도 숙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혼자 여행을 가면 식비는 줄이더라도 숙박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29박의 숙소를 예약해야 하는 상황에서 숙박에 욕심을 부릴 수가 없었다. 식비든, 교통비든 최대한 줄여야 하는 배낭여행자로서 온갖 종류의 숙소를 경험했다.
그중 가장 강렬한 경험을 준 것은 야간 이동이다. 해외여행에서 야간 이동은 불편한 잠자리와 함께 소매치기의 위험이 동반된다. 야간 버스의 짐칸에 두었던 캐리어를 통째로 잃어버렸다던지 품에 안고 잠들었던 손가방이 사라졌다는 둥 출처를 알 수 없는 괴담이 많았다. 하지만 이동시간을 줄이고,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우리는 야간 이동을 택했다.
첫 번째 야간 이동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넘어가는 여정이었다. 오스트리아의 국철을 통해 이동했다. 야간열차에도 등급이 있는데, 우리는 일반석을 택했다. 상급의 객실에는 세면대와 개인 짐 보관 락커가 있었지만 가격차이가 거의 두 배에 달했다.
“누워서 갈 수 있는 거지?”
“응, 휴대폰 충전도 할 수 있대.”
예약일이 다가올수록 객실 가격이 오른다는 사실에 친구와 최소한의 정보만 확인한 뒤 쿨하게 결제를 해버렸다. 야간열차를 타야 하는 잘츠부르크에 도착하자 문득 궁금해졌다.
이동을 하루 앞두고 이것저것 알아보기 시작했다. 우선 새벽 1시 40분에 출발하는 차를 타기 위해 캐리어를 들고 기다릴 곳이 필요했다. 10월 초의 잘츠부르크는 날씨가 춥기도 했고 역사 내 있을 곳이 마땅치 않아 보였다. 일정이 임박해서 숙박을 하루 더 추가하려니 남은 방이 없었다. 기차 타기 전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당일 정오 체크아웃 후에 짐도 맡겨야 하는데 대책이 없었다. 당시 머물고 있던 호스텔의 리셉션을 찾아가 불쌍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혹시... 체크아웃 후에 짐을 좀 맡길 수 있을까?”
“체크인 전에 짐 맡겼던 것처럼 열쇠 가져가서 짐 보관함에 넣어놓으면 돼.”
별 것 아니라는 듯 직원이 친절하게 답했다. 도난 위험이 없는 보관함을 무료로 쓸 수 있다니! 잘츠부르크 물가가 비싸 1박당 최고 숙박비를 지불했는데 드디어 숙소가 제값을 하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숙소 1층에는 대형 로비가 있어서 물도 살 수 있고, 휴대전화 충전도 할 수 있었다. 새벽 늦게까지 시간을 때우기에 딱이었다. ‘야간 이동의 전조가 좋은데?’라는 생각에 마음이 좀 놓였다.
잘츠부르크 마지막 날 일정을 마쳤다. 옷을 갈아입고 마트에서 저녁을 사 와 로비에서 먹었다. ‘두 시간이나 남았으니 다음날 일정 좀 검색해볼까?’하는 마음으로 폰을 집어 들었다. ‘아차, 기차 바우처 챙겨야지.’ 야간기차표를 모바일로 다운로드하여 저장하는데 객실 정보가 떴다. ‘응? middle? 2층 침대가 아니라 3층 침대였어?’ 친구와 함께 나란히 같은 칸 양쪽의 2층 침대에 배정됐다. 지정석으로 표를 구하면 가격이 더 비싸져서 어느 자리든 신경 쓰지 않기로 했는데 당연히 2층 침대라고 생각한 것이다.
블로그를 통해 검색해보니, 일반석은 중간 자리가 가장 좁고 불편하다고 한다. 심지어 베드 버그를 겪었다는 후기도 있었다. ‘역시...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지.’ 생고생 배낭여행을 목표로 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의 불편을 감수한 여행이었다. 하지만 더럽고 불편한 곳에서 마음 졸이며 잘 생각을 하니 짜증이 밀려왔다. ‘좀 더 알아보고 살 걸’, ‘객실을 업그레이드했어야 하는데’, ‘짧게 이동할 수 있는 경로를 짤 걸’하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기차를 탈 시간이 다가오고, 플랫폼에서 몇 번이나 행선지와 번호를 확인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야간기차에 올라탔다. 두리번거리며 객실을 찾았다. 문을 여니 불이 꺼진 객실에서 자고 있는 승객의 장딴지가 보였다. 사람 두 명이 서 있기도 좁은 복도에 캐리어가 굴러다니지 않도록 끼워 넣었다. 1층 침대를 밟지 않고 2층 침대로 올라가 몸을 구겨 넣는 아크로바틱을 해냈다. 좌석을 확인하는 승무원이 오는 건지 이대로 잠들면 되는 건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그 와중에 ‘할 건 해야지’하는 생각으로 휴대폰을 도난방지 손목밴드에 연결하고 습기가 올라오는 침구에 담요를 깔았다. 에코백을 꼭 끌어안고 잠들려는데 승무원이 들어왔다. 바우처 확인을 해야 한다며 자지 말고 기다리라고 한다.
자고 있는 승객들 탓에 어둠 속에서 속삭이며 대화를 했는데 승무원이 “너 내일 아침 먹니?”라고 묻는 것이었다. 긴장한 탓에 이것도 잘 들리지 않아 추측한 것인데, 추가 서비스를 신청한 적이 없기에 무엇이 됐든 ‘No’라고 답했다.
이탈리아 사람으로 느껴지는 승무원이 하이톤의 빠른 말투로 무언가 덧붙였다. 의사를 분명히 밝혀야 할 것 같아 고개를 흔들며 단호히 ‘No’를 다섯 번쯤 외쳤다. 나중에 친구가 아무렇지 않게 커피를 시키길래 정신 차리고 들어 보니 커피와 차 중 무엇을 선택하냐는 말이었다. 앞뒤 사정 듣지 않고 선택지에 없는 ‘No’를 외치자, “이거 공짜야. 왜 안 먹는다고 그래”라며 불쌍한 마음에 재차 권유했던 것 같다.
승무원은 떠나갔고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중간 침대에서는 빠르게 잠드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휴대전화 충전기를 꽂고 덜컹거리는 객실에서 잠을 청했다. ‘하.. 여기서 어떻게 잠들지’하던 걱정이 무색하게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이 보였다. 눕자마자 잠든 것이다.
승무원이 다시 들어와 각 침대의 머리맡에 트레이를 놓고 갔다. 버터와 잼, 커다란 통밀빵 2개, 따뜻한 커피와 음료가 나왔다. ‘하.. 내가 저걸 안 먹는다고 했구나’하고 후회하는 사이, 내 자리에도 트레이를 놓고 가는 것이었다. 어제 객실에 들렀던 승무원이 눈치껏 커피로 아침을 준비해준 것이다.
이게 뭐라고 낯선 땅에 도착하자마자 감동이 밀려왔다. 마음을 추스르며 누운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자세로 통밀빵 2개를 다 먹어치웠다.
“이것이 이탈리아의 맛인가...!”
텁텁할 것 같았던 빵이 버터와 커피를 만나 풍미를 만들어냈다. 커피 맛에 둔감한 편이지만 이건 누가 먹어도 맛있는 맛이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이탈리아에 입국했다. 베드 버그, 소매치기를 이야기하며 호들갑을 떨었던 전날 저녁이 무안하게 7시간의 이동시간 동안 꿀잠을 잤다. 여행에서의 경계와 긴장은 필수이지만 역시 경험해봐야 알 수 있다는 여행의 진리를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