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 씨는자타공인눈이 높은사람이다. 오래전부터 워낙 이상형이명확해서 주변인들도 모두 알 정도다.본인만의 구체화된 그림을 그리고 있어서 그런지실제로이상형에 부합하는 사람들을곧잘만나왔다. 물론 예외도 있었지만.
은수 씨의 이상형은 그녀의 연애 역사에 따라 줄곧 업데이트되었다.나이 차이 많이 나는 능글맞은 연상을 만난 후엔 순수한 또래 친구가 이상형 리스트에 추가됐고, 너무나 애 같았던 동갑과 연애한 뒤엔 뚜렷한 직업이 있고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커리어 맨이 추가됐다. 그렇게 그녀의 이상형은버전 1, 버전 2, 버전 3 등등을 거쳤다. 결국 산전수전 겪으며 열심히축적해 온데이터의산실인 셈이다. 그러나 버전이 업데이트됐다고 해서은수 씨의 이상형이 바뀌어 온 것은 아니다.카카오톡에여러 기능이 추가됐어도 그 정체성은 채팅 앱인 것과 같은 이치다. 더 세밀해졌을 뿐 근간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친한 지인들 모두가 은수 씨의 이상형을 안다.
이따금 안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 은수 씨에게 소개팅을 시켜준다는 명목 하에 혹은 본인이 그에 부합하는지 맞춰보기 위해 이상형을 물어볼 때가 있다. 그럼 은수 씨는 "키 크고 어깨 넓은 사람이요. 나이 차이는 위아래 상관없이 5살까지만. 음 성격은 일희일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적당히 무던하고 담백한 스타일? 너무 감정적이거나 소심한 성격은 싫어요. 배포가 컸으면 좋겠어요. 아, 특히 돈에 인색한 사람은 딱 질색.그리고 차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데 이왕이면 있는 사람이 좋아요.또 술은 즐길 줄 알았으면 좋겠네요"라고 답한다.
은수 씨의 이상형을 듣고 나면 사람들은 비난 섞인 조롱을 하거나, 걱정하거나, 신기하게 바라본다. 조롱하는 사람들은 보통 오버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너 주제에) 눈이 너무 높으면 연애를 못할뿐더러 그렇게 재고 따지면 좋은 사람을 놓친다고 훈수를 둔다. 물론 은수 씨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하지만 그녀는 안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도 속으로는 나와 같을 거라는 걸. 채점표를 만들어놓고, 애인이 될만한 사람인지 점수를 매기고 있을 거란 걸.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은수 씨는 안다.
'아무나 만나지 않는다'
은수 씨는 아무나 만나지 않는다(일명 아만다)라는 소개팅 어플을 극찬한 바 있다. 이름부터 공감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그에 맞는 수준 높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심어주기 때문이다. 은수 씨는 어플의 이름처럼 사람들은 아무나 만나고 싶지 않은 욕망을 품고 산다고 믿는다. 수많은 소개팅 어플이 유저의 정보를 자세히 입력하도록 유도하는 이유 또한 그러한 사람들의 욕망을 실현시켜주기 위함이라. '아무나 만나고 싶지 않죠? 이상형을 만나고 싶죠? 그럼 당신이 누구인지 보여주세요. 얼굴과 키는 어떤지, 어디에 사는지, 연봉은 얼마인지, 종교는 있는지, 취미는 있는지 모두요. 여기서는 모두 본인의 정보를 오픈해요. 그럼 그 정보 속에서 당신이 찾는 이상형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은수 씨는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이런 사람이 좋다'는 것을 당당히 드러냄으로써 아무나 만나지 않겠다는 욕망을 실현한다. 사실 그녀는 이상형은 말 그대로 이상적인 형태이기 때문에 반드시 현실적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유니콘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은수 씨는 본인이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알고 드러낼 뿐이다. 그 또한 본인의 가치를 증명하는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녀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비난받을까 봐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말하지 못하는 것만큼 미련한 것은 없다고 여긴다. 욕망하는 자는 그 자체로 가치 있다.
은수 씨의 구체적인 이상형은 때로는 방패막이되어주고, 때로는 되지도 않는 사람 갖다 붙이지 말라는 경고로써 작용한다. 누가 봐도 나이가 10살 이상 차이 날 것 같은 사람의 소개를 말 안 해도 거절할 수 있고, 별생각 없이 찔러보는 남자들의 호감도 차단할 수 있다. 그녀는 애초에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고, 괜히 감정 상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 따라서 은수 씨의 이상형이 다운그레이드 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