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도 말했듯이 난 학년이 바뀔 때마다 친한 친구가 바뀌었어. 내 노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냐. 나랑 친한 친구들은 주로 사는 동네도 달랐고, 하교 후에는 주로 동네 친구들이나 형이랑 놀았기 때문에 친구들의 집에 놀러 가지 않는 이상 따로 볼 일이 없었기 때문이지. 물론 학년이 바뀌어서 매일 못 보더라도 만나면 반갑게 인사는 했어. 하지만 예전처럼 자주 보긴 힘들었지. 따로 연락할 방법이 집전화 밖에 없기도 했는데, 중학생 남자끼리 징그럽게 집전화 붙잡고 두런두런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수다를 떠는 것도 웃기잖아.
착하고 스마트한 아이
여튼 1학년 때 엄청 절친이 있었어. 이름은 황인수(가명)라고 해. 얘는 딱 얼굴을 보자마자. '순해 보인다. 착해 보인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야. 그래서 품성이 악질인 녀석들이 보면 딱 괴롭히기 좋은 타입일 수도 있는데 다행히 인수는 키도 나만했고 농구를 잘했어. 그래서 질 나쁜 애들도 딱히 건들지는 않더라.
인수는 공부도 곧잘 했고 항상 상냥한 타입이었어. 모르는 걸 물어보면 다정하게 조곤조곤 골똘히 생각에 잠기며 문제를 풀어주곤 했지. 그런데 웃긴 건 성적은 나랑 비슷했어. 여튼, 잘 웃는 편이기도 하고 긍정적인 편이라 나도 좋은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 우리는 성향도 비슷하고 농구도 좋아하고 애니메이션에도 관심이 많고(난 한국, 걘 일본) 그리고 무엇보다 집에 드래곤볼 시리즈를 단행본으로 전권을 다 가지고 있었어. 난 몇 권 없었거든. 그래서 학기가 지날수록 친하게 지내다가 어느 날 인수가 날 초대했지.
"디와이, 우리 집에 놀러 갈래?"
인수 네 동네는 우리 동네와는 달랐어. 우리 도시에도 이런 곳이 있구나 할 정도로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가진 인수네 동네를 보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기분이었지. 거긴 대부분이 판자 지붕을 가진 판잣집들이었어. 거리에 집들은 대부분 1층짜리 집이었고 도로는 비포장이었는데 철없던 시절, 애들끼리 장난치며 놀리던 판자촌이 이런 집을 얘기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누가 봐도 판잣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지. 하지만 난 맹세컨대 인수네 동네를 다녀온 뒤에도 단 한 번도 인수를 안쓰럽게 생각하거나 그걸로 다른 친구한테 말해서 장난친 적은 없어. 그냥.. 그런 걸로 장난치면 안된다는 건 기본적인 매너고 상식이니까.
무서운 누나들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니까 인수가 길 건너에서 두 팔을 들고 환영해주더라. 덕분에 완전히 새로운 동네로 와서 약간 긴장했던 마음도 풀어지고 금세 기분이 좋아졌지.
"우리 동네 멀제? 허허."
"아이다. 이 정도는 껌이지."
인수 집은 정류장에서 10분 정도 거리라서 인도로 보이는 길 가장자리를 따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걸어가고 있었어. 어느새 눈앞에 양 가래 큰 길이 나오더라 한쪽은 그대로 직진하는 길이고 하나는 동네로 들어가는 어귀로 길의 폭은 차 두대가 한 번에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어. 그런데 그 양갈래의 길 어귀에 멀리서 한눈에 봐도 불량스러워 보이는 누나 셋이 앉아있는 거야. 왜 누나들이라고 했냐면, 그냥 딱 봐도 우리보단 누나들이었어. 한 중3이나 고1 정도.
"인수야, 저기 누나들 쫌 무서운데."
“어.. 디와이, 그냥 저쪽은 쳐다보지 마라.. 알긋제?"
그런데 하지 말라고 하면 꼭 한 번은 하게 되잖아. 인수 말대로 그 누나들과 눈을 안 마주치기 위해 애써 멀리 산을 보다 인수를 번갈아 보던 중 어느새 무서운 누나들과는 3미터도 안되게 가까워졌어. 왜냐하면 거길 지나가야 인수 집에 갈 수 있었거든. 그래서 그냥 자연스럽게 눈을 돌리다가 누나들 쪽을 봤는데 불량스럽게 짝다리 짚고 선 누나 하나, 벽에 기대서 껌을 씹는 누나 하나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가운데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더군. 불량학생들은 신기하게도 하나같이 껌과 담배를 좋아해.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운데 앉은 누나가 보통이 아니었어. 한눈에 알아봤지.
'대장이구나.'
가뜩이나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부라리며 노려보는데 실수로 눈이 마주친 거지. 그래서 얼른 눈길을 돌리려고 눈을 약간 내리깔았는데 하필 그 누나가 짧은 치마를 입고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두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있는 거야. 마치 동네 사람들 다 구경하라는 듯이.. 더더욱 당황한 나는 왼편으로 눈알을 굴렸는데, 왼쪽 무릎에 불량스럽게 걸친 왼팔엔 어떤 머저리가 한듯한 문신도 있었지. 총체적 난국이었어. 태도, 담배, 몸가짐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편견 아니냐고?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봐도 그냥 불량한 누나들이었어. 하필, 또 그때 길에 찍- 하고 침도 뱉더라. 그래서 다시 그 누나들을 볼 용기가 안 났지. 우리 동네도 아니고 생전 첨 오는 동네에서 괜히 시비 붙고 싶진 않았거든. 다행히 그 누나들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었나 봐. 우리 둘을 스윽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보진 않더라.
인수네 집
인수네 집은 그 갈래길을 따라 조금 걸어간 뒤 판잣집 사이로 나있는 작은 골목 언덕을 올라가다 보면 진한 회색의 제법 높은 담장을 가진 집이었어. 담장은, 그거 아려나? 반듯하고 깔끔한 벽돌이 아닌 마치 소보로 빵의 겉면처럼 시멘트를 아주 거칠게 발라서 잘못 부딪히면 살갗이 벗겨 질정도로 위험해 보이는 벽면 말이야. 여하튼 그런 담장을 끼고 돌아가니. 인수네 집 대문이 보였어. 뭐랄까, TV에서 보던 판잣집이긴 했지만 대문 안으로 3~4평은 될만한 마당도 있고 동네의 다른 집들에 비해선 꽤 좋아 보였어. 때마침 인수 남동생이 마당 벽에 걸린 농구대에 슛을 하며 놀고 있더라. 간단히 인사하고 인수가 동생에게 나가 놀라고 얘기하고 들어가려는데 동생이 안 나가고 농구하겠다고 떼를 쓰는 거야. 그래서 인수가 타이르듯이 몇 번 얘기하다가 동생이 계속 말을 안 들으니, 갑자기 무서운 얼굴을 하더니,
"황인주, 나가서 놀아라. 어?"
딱 이렇게 겁을 주더군. 동생은 아차 싶었는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하곤 밖으로 나갔지. 아니.. 인수야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뭐, 인수는 나랑 조용히 놀고 싶었나 보다 했어. 여튼 매일 해맑게 웃기만 하던 인수의 터프한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지.
집안엔 아무도 없었는데 물어보니 인수 어머니는 일을 나가셨다고 하더라. 인수 방은 꽤 아담했는데 남학생의 방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깔끔했어. 밖으로 나있는 창 아래의 책상은 마치 자로 잰 듯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었지. 가지런한 책과 연필통에 담긴 필기류 등등. 인수의 세심한 성격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어. 나도 꽤나 정리를 자주 하는 편이지만 매일 이렇게 깨끗하진 않아서 좀 신선한 자극을 받았지. 그리고 책상 아래로 무언가 가리려고 천으로 덮어놓았길래 그게 뭔지 물었는데 인수는 싱긋 웃어 보이더니 곧 발표를 하더군.
"디와이, 이게 뭔지 알아? 으하하."
"뭔데 뭔데. 빨리 알리도."
"짜잔."
맙소사. 천을 걷어내자. 드래곤볼 전권, 슬램덩크 단행본 그 외 수십 권의 만화책이 아주 가지런하게 정리되어있더라. 가히, 남학생들의 로망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지. 나도 만화책이 있긴 하지만 수십 권의 단행본을 살 정도는 아니었고 '아기공룡 둘리 10권 전권'이랑 드래곤볼 몇 권 그리고 기타 한두 개씩 사본 만화책이 전부거든.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둘리가 꽤 재밌어. 그냥 애들 만화는 아냐.
케이블 TV 속 그녀
"자, 디와이, 먹자."
라면을 끓이러 나간 인수를 기다리며 방에서 만화책을 보고 있었는데 곧 인수가 라면과 김치 그리고 흰밥을 한가득 퍼서 상을 차려왔어. 라면은 언제나 맛있잖아. 배불리 먹은 우리는 만화책을 조금 보며 뒹굴대고 있었지. 그러다 갑자기 인수가 방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다시 집안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더라.
'왜 저러지.'
"디와이, 큰방으로 와봐. 보여줄 게 있어."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다시 한번 분명히 확인한 인수의 표정은 몹시 진지했는데 입꼬리엔 묘한 미소가 걸려있더군. 그리고 곧 TV를 튼 인수는 채널을 엄청 뒤로 돌리는 거야.
"야, 느그집 TV 채널이 왜 이래 많노?"
우리 집은 케이블을 보지 않아 기껏해야 10개 정도의 채널이 전부였는데 인수네 채널은 적어도 100개는 되는 듯했어.
"있어봐, 내가 재밌는 거 보여줄게. 흐흐흐"
케이블엔 일본 방송이 많았는데 NHK 등의 방송은 나도 본 적이 있어서 아는 척하며 도대체 얘가 뭘 보여주려나 기다리고 있었지.
"어, 이거다. 이거!"
TV 화면엔 웬 나이 든 남자와 젊은 여자가 얘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왔어. 일본어라 내용은 모르겠지만 분위기를 보니 드라마처럼 보였어.
"인수야, 이게 왜..?"
"쉿, 지금이야. 잘 봐"
화면만으론 마치 한국의 일일연속극 같은 장면이라 영문을 모르고 보고 있던 내게 눈을 의심할 만한 장면이 펼쳐지는 거야.
"야, 이거 미친.."
화면 안의 젊은 여성은 갑자기 상의를 벗었고 곧 상반신은 나체가 되었지. 내용은 모르겠어. 그 뒤 별다른 일은 없었는데 공영 방송에서 그것도 일일 연속극 같은 드라마에서 상의 노출을 할 줄이야. 상상도 못 했던 장면이었지.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드라마를 시청했고, 우리 착하고 순진한 줄만 알았던 인수가 나보다는 조금 어른에 가깝다고 느껴진 순간이었어.
집으로
"인수야, 집에 왔나? 엄마 왔다."
한참 TV에 빠져있던 우리는 인수네 어머니가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오시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황급히 채널을 돌렸어. 그리고 곧 인수 어머니가 집으로 들어오시자 나는 방을 나가서 큰 소리로 인사드렸지.
"아, 우리 인수 친구가? 그래 반갑다. 인수야 친구 밥은 줬나?"
"어, 아까 라면이랑 밥 먹었다."
"야야아, 라면이 머꼬. 친구가 왔는데 냉장고에 찌개랑 불고기 있는데 데파먹지 그랬노."
"아닙니다. 라면 잘 먹었습니다."
인수 어머니는 곧 집안일을 시작하셨고 시간은 벌써 오후 5시 30분을 넘어가고 있었어. 집에 갈 시간이 되었지. 인수는 버스정류장까지 날 데려다준다고 했어. 인수네를 나서서 동네 어귀로 가는데, 혹시 아까 그 무서운 누나들이 아직도 있는지 괜히 신경 쓰이더군. 그런데 어떤 멍청한 양아치 형들이 데려갔는지 이미 사라지고 없었어. 난 버스를 탔고 인수는 내가 탄 버스가 고개를 넘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더라. 인수는.. 참 착한 녀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