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이 보내는 시그널, 생존을 위한 움츠림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살아야만 하고 살아남아야만 하며 적어도 지금 나의 모습과 생활은 유지하는게 기본적인 삶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식물이라고 두려움을 모를까? 아픔을 느끼지 못할까? 소리내지 않는다고 괜찮다는 의미가 아니듯이 두려움과 아픔을 표현하는 방법이나 신호가 다를 뿐, 생명을 가지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기본적으로 성장과 번영에 대한 목표가 그들의 DNA에 각인되어있고 우리 모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의 종족'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사라지지않고 영원히 대를 이어가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그 영원불멸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밑바탕에는 '두려움'이 있다. 흔히, 두려움은 나약하고 뒤처지고 퇴보적인 감정이라 사람들은 두려움을 꺼려하고 부정적인 감정으로 생각하는데 실상을 알고나면 두려움이 얼마나 위대한 감정이며 생명체들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새삼 놀라게 될 것이다.
두려움의 민낯
우리는 대개 '강자', '챔피언', '사장(대표)'들은 두려움이나 나약함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승리의 상징이며 다른 강자 또는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그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기에 두려움 따위는 없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게 사실일까?
사실, 1등, 챔피언, 왕, 사장, 대통령, 리더 등등 누군가를 이기거나 이끄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컴플렉스와 두려움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고 있다고해도 무방하다. 그들은 언제 누군가에 의해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지도 모르며 항상 경쟁자들의 도전에 응해야하며 꿋꿋이 그 자리를 지킨다고해도 더 이상 나아갈, 올라갈 곳이 없다는 막연함이나 허탈함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그들을 매 시간 흔들어놓기 때문이다.
그럼 1등이나 리더가 아닌 보통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은 자신이 강자에 비해서는 약자이기에 항상 두려움에 떨며 숨어지낼까? 나보다 강한 누군가가 있기에 항상 두려움에 싸여 지내야 할까?
그런데 그것도 좀 다르다. 위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두려움은 겉으로 보기에는 움츠러들고 숨는 부정적인 성향의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않다.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본능적으로 내가 유리한 방향을 선택하라는 신호이고, 여기서 유리하다는 것은 지금 당장은 피하거나 굴복하거나 패배 할 지라도 미래에는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두려움'이 가지는 가장 본능적이면서도 기능적인 역할이며 그 덕분에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세대에서 자신의 생명을 연장했고 길어진 생명만큼 자신의 자손을 더 널리 퍼뜨릴 수 있었다.
즉, 약자, 초식동물, 식물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현실은 굴복하되 미래의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으며 따라서, 지금 이 글을 쓰는 필자, 이 글을 읽는 여러분 그리고 지구상에 생존 중인 모든 생명체 등 우리 모두는 과거 우리 조상 대부분이 선택한 두려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물론, 용감함과 강함이 이런 생존 본능에 반한다는 것은 아니다. 용감함과 강함은 적극적으로 생존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쳤고 용감함과 강함으로 상징되는 소수가 지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위인들, 작가들, 역사 속의 장군들이라고 볼 수 있는데 하지만 이들은 극소수일 뿐, 대부분의 용감한 자들은 그 순간 생명을 다하거나 잘못되었을 확률이 두려움으로 몸을 피하고 숨었을 확률보다는 훨씬 크다는 것이다.
참고로 여기서 두려움으로 인한 굴욕적인 굴복(매국 등)이나 배신은 조금 다른 해석이 필요하다. 그들 역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해 짧은 생존을 선택했지만 다른 동물들과는 다른 문화, 민족, 국가라는 개념이 있는 인류는 개개인의 감정, 이권, 집단의식, 민족, 자율권 등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해석이나 결론이 나올 수 있는데 매국노들의 두려움에 의한 굴복은 결과적으로 민족의 말살과 대다수 사람들의 희생 등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기에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반드시 극복했어야했다.
두려움의 다양한 역할
우리는 가끔 다큐멘터리나 기사를 통해서 놀라운 소식을 접하곤 한다. 사자가 어린 사슴을 보호하며 지켜주기도 하고 늑대들이 버려진 아기를 돌봐 수 년을 기르기도 하며 종을 넘어 타 종의 새끼를 맹수들이 보호하거나 잡아먹지않고 내버려두고 가기도 하는 것들 말이다. 보통, 감정이나 이타심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 동물들의 이런 행위는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사실, 이 역시 생명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 만들어낸 보호장치라고 볼 수 있다. 그럼 두려움과 이 사건들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모든 생명체의 아기 또는 새끼는 거의 모두 귀엽다. 심지어 나무의 새순이나 어린 시절의 잎도 앙증맞을 정도로 귀엽다. 그 동안 귀여움을 알고 느끼는건 인간들의 고유 감정으로 여겼지만 최근 이 감정들은 동물들도 똑같이 느낀다는 걸 여러 연구들이 보여준다. 즉, 새끼 때의 귀여움은 천적, 버려짐으로 부터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타 동물이나 사람으로부터 귀여움, 애처로움, 보호본능, 모성 등을 불러일으켜 그들의 생명을 연장하게 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이는 생명이 가지고 있는 본능인 두려움이 만들어낸 놀라운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문신을 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지금도 지구 곳곳에 남아있는 원시부족들이나 과거 원시, 선사 시대의 부족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종족에서 문신, 화려한 색으로 치장 또는 천적과 비슷한 매서운 눈, 이빨 등을 활용한 위장 등 타인, 맹수들에게 위협이 될만한 위장을 해왔다. 이는 맹금류의 눈과 비슷한 문양의 날개를 가진 나비, 나방들이나 화려한 색으로 몸을 부풀리고 날개를 펼쳐 자신들의 기존 몸보다 큰 몸집을 만드는 새 등이 보여주는 방어 행위와 비슷하다. 즉, 문신의 심리는 두려움의 극복, 강인함의 표출이 기본적인 심리이며 나아가 미적감각의 발현, 소중한 사람/물건, 추억 등의 기념 등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과시 본능이 숨어있는데 사실, 이 과시 본능도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를 좀 알아줘, 이 문신들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물건에 대한 내용이니 알아둬'와 같은 잊혀지거나 무관심에 대한 1차원적인 두려움이 그 바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제 아무리 문신이 패션으로 승화된 지금이라고 하더라도 원시 부족민이, 조직폭력배들이 문신을 한 이유가 강함의 표출이 아닌 두려움이 표출된 것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으며 현대의 문신 애호가들도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문신으로 승화되었을 뿐, 그 과시 욕구도 두려움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다.
의사소통도 마찬가지다.
현대의 언어라는 체계적인 의사소통방법이 발전하기 전, 아주 먼 과거의 사람들은 소리나 몸짓을 통해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는데 이 방법이 항상 유연하게 소통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언어는 지역별로 서서히 발전하며 퍼져나갔고 지금에 이르러 우리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언어를 가지게 되었다. 자, 그런데 이 의사소통과 두려움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아마도 상대방은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거나 도와 줄 수 없을 것이고 그럼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급기야 생존에 위협을 느낄 수 도 있다. 게다가, 상대방이 나의 의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적대적으로 나오거나 내가 상대방의 호의를 적의를 받아들이고 공격한다면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 생존에 위협을 느낄 것이다. 여기에 해답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의사가 상대방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의사소통을 발전시켜왔으며 그 덕분에 언어는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대에도 그 두려움은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데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쓰이고 힘을 가진 언어인 '영어'를 보면 의사소통에 대한 두려움과 사람들의 반응을 알 수 있다. 영어가 왜 세계공용어가 되었는지는 굳이 역사를 예로 들지않아도 이해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과 두려움은 또 무슨 상관일까?
그건 바로 전세계 많은 나라들이 영어를 사용하고 따라서 우리가 영어를 배우려고 기를 쓰고 달려드는데 답이 있다. 강대국들이 영어를 쓰고, 경제의 흐름이 영어를 쓰는 국가 및 기업들에 의해서 돌아가는 현실을 보면 우리가 이 시대에서 살아남고 그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영어를 배워야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 역시, 영어라는 언어에 의한 커뮤니케이션 부재 시, 도태나 생존의 위협으로 부터 벗어나기위한 두려움이 밑바탕에 깔려있다는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자.
역사적으로 큰 왕국, 국가, 체제, 기업은 공포정치를 이용했다. 즉, 그들이 리더를 따르지 않으면 개개인의 생존에 위협이 가해지기에 사람들은 리더를 따르지않을 수 없었다. 이는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에게서 보여진 두려움이다. 그런데 여기서 두려움은 보통 사람들만의 몫은 아니었다. 역사 속의 왕, 대통령 등의 리더도 보통사람들과 똑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는데 리더들의 두려움은 보통사람들의 잣대와는 조금 달랐다. 과거의 왕이나 리더들은 다같이 더불어 살고, 믿고, 의지하며 사는 방식으로는 자신들의 체제가 질서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공포로 민중으로 다스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와 주변과 주변 국가 및 전세계를 둘러보자 왜 트럼프는, 김정은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결정을 내리며, 사람들의 욕을 먹으면서도 자신의 노선을 바꾸지 않고 체제를 유지하려고 할까? 그건 바로 자신들의 위치와 미래 등 그들의 위치가 흔들려 추락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사라져버리는 것에 대한 강력한 두려움이 밑바탕에서 그들을 조종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들은 그 두려움을 '두렵다는 감정'으로 받아들이지않고 '경제유지, 질서확립, 체제유지라는 명목을 내세워 합리화하고 적법화해버리기에 적어도 그 자리에 있는 동안에는 진짜 두려움의 본질은 알지 못한 채 안개 속을 달려가고 있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삶 속의 두려움
부모와 자식, 친구들, 회사 동료들, 선후배들 등등 한 개인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원하든, 원치않든 맺게되는 관계는 본인의 의지에 따라 수 십에서 수 천 가지의 관계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을 하고, 기뻐하고, 싸우고, 중재하고, 헤어지고, 이별하며, 또 화해하고, 이해하며, 인정하고, 배워가며 수 많은 관계들을 만들고, 유지하며 또 종종 그 관계들을 정리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만들어내는 이 '관계'의 저변에도 역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 '이 사람과 잘 지내지 못하면 어쩌지?', '이 말은 꼭 해야하는데 싸우게 되면 어쩌나?', '내가 한 행동 때문에 그 사람이 앙심을 품거나 잘못된 판단을 하면 어떡할까?' 등 관계라는 건 한 번 시작되면 적어도 몇 번은 부딪힐 수 밖에 없는 일이 발생하게 마련이고 그런 사건들의 전후에는 항상 두려움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생겨나 우리를 괴롭힌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두려움들은 모두 상대방과 잘 지내고싶은 욕구에 의한 반사적인 심리상태라는 것인데 이를 극복하거나 배려할 때 관계는 더 발전하고 미래에는 부딪힐 일이 더 적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양방이 슬기롭게 알맞은 접점을 찾았다는 전제하에 의한 결과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떤가? 이제 여러분의 마음 속에 항상 자리잡은, 때로는 불쑥 나타나는 두려움이 우리의 삶과 관계 그리고 집단, 나아가 국가나 민족의 운명까지도 좌지우지하는 감정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 덕분에 인류의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져온 것도 이해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제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대해 새롭게 바라봐야 할 때이며 두려움을 느낄 때 생각해봐야 할 기본적인 포인트는 아래와 같다.
무엇이 두려운가?
왜 두려운가?
어떻게 반응/극복 할 것인가?
이후 기대되는 반응은 무엇인가?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생존을 위한 본능의 발현이다. 인류와 모든 생명은 두려움을 이용하고 극복하여 지금까지 자신의 종들을 지구상에서 번성시켜왔다. 만약 앞으로 두려운 일이 생긴다면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자.
지금 느끼는 두려움을 어떻게 활용해서 나에게 유리하게 만들 것 인가?
내가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이나 과정이 타인에게 피해가 가는가?
이 두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다면 딱히 그렇게 두려운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 두려움은 우리에게 재빨리 현명한 선택을 하라는 본능의 신호이며 이에 우리는 이제 적절한 대처를 하면 된다. 그 뿐이다.
(메인이미지 출처: entrepreneur.com의 Jason Ankeny 포스팅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