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더 이상 피할 곳 없는 이들의 혐오스런 선택
서로 미워하면서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다.
이성, 동성, 지역, 국가, 인종, 종교 등등 그 동안 쉬쉬하거나, 점조직으로 행해지거나, 역사와 비윤리를 등에 업고 행해지던 혐오가 드디어 보통사람들의 일상의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리고 그 보통 사람들은 더이상 '무식'하거나 '권리'가 없거나 '기회'가 없는 이들이 아니고 오히려 '분노'에 차있고 '영향력'을 행사하길 원하며 그로인해 '자신'의 색을 찾아 공고히 하길 원할 뿐이다.
특정 물건, 성별, 단체, 세대, 인물, 기업, 사회 현상 등을 혐오하는 단체와 사이트는 이제 하루에 한 번 꼴로 그와 관련한 기사가 날 만큼 우리 사회에서 혐오는 일상적인 문제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혐오는 단순히 감정의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를 떠나 특정 물건, 인간, 집단에 대한 구체적이고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변했고 이런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은 대부분 익명의 활동가이거나 집단에 속해있는 무수한 개인들이다. 즉, 혐오는 표출하되 자신은 노출하지않는 이들이다. 이는 인터넷 기사에 악성 댓글을 다는 익명의 사용자들과 유사한데, 그들은 자신들의 표현의 자유에는 관대하지만 고통받는 대상의 감정에는 극히 무관심하다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 한다. 한마디로 자신들은 비난과 혐오의 표현을 통해 정신적인 승리와 쾌감을 얻길 원하지만 자신들의 신분이나 위치가 노출되어 역비난, 공격 및 자기에 대한 혐오는 피하고싶은 두려움이 함께 존재하기에 이런 현상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혐오'의 속성을 알 수 있다. 혐오는 (누구든 무엇이든) 자신이 극복하지 못하거나 정신적, 육체적으로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자기방어기제의 일종으로 표현된 원시적이고 미성숙하며 유아기적인 전달방식이라는 것이다.
타 인종을 혐오하고 배척하는 단체인 KKK나 스킨헤드 등 의 활동 내용을 보면 혐오를 바탕으로 한 극성 단체들이 얼마나 원시적이면서도 야만적으로 특정 사람, 인종, 대상을 괴롭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들의 잔혹한 행동에 대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이유나 논리적인 근거는 없다. 그들과는 다른 인종이나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고 고통을 가 할 뿐이다. 그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우월한 자신들의 종(species)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과 자신들과는 다른 종들에게서 느끼는 불편함을 극도로 혐오하고 그들이 다른 종에 의해 정복당하거나 멸종될 희박한 확률에 대한 우려와 두려움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혐오는 자기 방어를 위한 본능적인 방어기제라는 걸 알 수 있으며 혐오라는 감정의 발현 이유가 본능적인 자기방어, 공격, 권력의 유지 그리고 생존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온라인에서 설전을 벌이는 모든 형태의 혐오 행위는 모두 원시적이면서도 본능적이고 극단적인 두려움에 의한 자기 절제를 잃은 이들이 집단, 권력 이라는 이름의 망령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혐오의 대상과 혐오를 행사하는 이들의 사회 속에서, 그리고 관계 내에서의 위치는 항상 일정하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혐오는 항상 약자를 향해있으며 혐오의 대상은 보통 소수 민족, 단일 민족, 열등 인종, 소수취향그룹, 하위 계층이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역사적으로 여성, 동성애자, 서민들이 상대적으로 우세한 위치에 있는 상위계층, 정복 민족, 남성 등에게 혐오를 당해왔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그리고 이는 다양한 대상화(objectification)을 통해 '그들, 그것들은 ~한 존재 또는 ~한 것'으로 규정되어 널리퍼지고 대대로 학습되어왔다.
약자가 강자를 혐오한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가? 약자의 강자에 대한 혐오나 분노의 표출은 대개 '저항, 개혁, 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강자의 것과는 전혀다르게 조명되어 왔는데 이런 현상만 보더라도 그 동안 역사적으로 수 많은 강자들이 얼마나 약자 위에 군림해왔고 혐오라는 말이 얼마나 지배적인 단어로서 약자들을 괴롭혀왔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 혐오의 가장 무서운 점은 혐오의 대상을 대상화하고 프레임을 입힌 특정인이나 소수가 아닌 빠른 전염성에 있다. 과거에는 보통 한 마을, 특정 지역 정도에 국한되었던 혐오가 이제는 거의 국가적인 수준에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확산되는데는 채 몇 시간 아니 몇 분도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급진적인 확장성과 전염성이 현대의 혐오의 위험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특정인, 집단을 혐오하는 커뮤니티 내 무수한 익명의 보통 사람들은 그 집단안에서 도덕성이 희석된 혐오 표출을 통해 심리적인 안정감은 물론 자신감까지 얻고 있으니 이런 혐오 행위에 혐오단체로의 가담은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그렇다면 단순히 혐오를 제한하고 말리기 이전에 혐오라는 것이 이토록 큰 사회적인 현상, 집단간의 갈등으로 대두된 이유와 그 저변을 한번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혐오는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우리는 수 많은 문학, 예술 작품, 기록을 통해 다양한 종류의 혐오를 목격해왔지만 지금처럼 사회의 구성원들이 패가 갈려 싸움을 벌인적은 없다. 왜, 어떻게 어쩌다 이런 현상들이 발생하게 되었을까?
1. 폭발적인 인구증가와 제 1, 2 베이비붐 세대의 탄생
세계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을 이후로 그리고 한국은 6.25전쟁 이후, 평화를 지향하는 강대국들의 기치아래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폭발적인 인구증가를 경험했다. 한국 역시 50~60년대 그리고 70년 후반~80년대 베이비붐 세대를 탄생시키며 인구의 급속한 증가를 야기했고 이에 수 많은 인류, 경제학자들은 10~20년 뒤에 닥쳐올 인구증가대란과 경제 및 실업대란을 예측했지만 각 국의 정권은 자신들의 임기내 성과를 빌미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곧 수 많은 사회 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다.
2. 경제발전과 부의 쏠림
개발도상국들의 선진화와 경제발전은 단기적인 수치로는 장미빛 미래를 약속하는듯했지만 결국 20:80의 법칙대로 부는 재분배되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낙수효과라는 달콤한 말로 대기업을 키우며 중소기업들을 달달 볶았지만 돌 마저 뚫는 낙숫물은 커녕 그 어떤 분배나 나눔도 없었다. 이는 서민경제를 더욱 바짝 조으며 80%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정신적인 공황을 초래하는 계기가 될 뿐이었다.
3. 서민경제난
이는 곧 서민경제난으로 이어졌다. 한국은 1997년 IMF, 2008년 미국발 모기지론 사태 등을 겪으며 서민경제는 10여년 내 두 번이나 바닥을 치게 된다. 그리고 이제 이런 우울한 경제상황은 일상이 되었다.
4. 취업인구의 급진적인 증가
80년대 무분별한 출산 장려 정책은 30여년이 지난 지금 취업대란, 실업대란으로 이어졌으며 현재 30, 40대 직장인, 취업준비생들은 대부분 10대 시절부터 친구들과의 끊임없는 경쟁과 시기, 질투 등을 경험하며 자랐고 이는 취업시장, 직장생활에서도 개인화, 무관심 등으로 여실히 드러났다.
5. 대규모 실업자 발생과 사회적 패배감 확산
결과적으로 대규모 청년 실업자가 발생하면서 고학력 백수가 천지에 널린 상황에까지 도달했다. 피끓는 청년시절 자신의 꿈은 커녕 평범한 직장생활도 어려워진 젊은 세대는 기형적으로 뒤틀린 사회구조안에서 절망하며 많은 것들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6. 3포세대도 옛말, 6, 7포세대 탄생 그리고 확대
'나'가 대두된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이 아니다. 나 하나의 삶도 지속하기 버거운게 현대의 삶이고 현재 젊은이들의 미래이다. 여기에 기성세대는 이 시대의 젊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고 있는지 전혀 모른채 '취업은 했니?, 결혼은 했니?, 애는 언제 가지니?, 연봉은 얼마니?, 애들 교육은 어떻게 할거니?' 등등 젊은 세대의 고민과 고충은 안중에 없고 시대착오적인 질문만하며 오히려 세대갈등 까지 부추겼다.
7. 서민들의 분노와 절망감 해소 실패
이에 서민들, 특히 젊은 서민들은 사회생활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절망에 빠지고 패배감에 젖게 되었다. 대개는 꿈 등 거창한 계획이 좌절되면 일반적인 사회생활을 통해 안정이라도 추구하며 사회에 적응하게 마련인데 이 시대의 젊은이들과 서민들은 그런 기회 마저도 잃게 된 것이다.
8. 곳곳에서 사회적인 문제 발생
시대의 고난과 스트레스를 풀 곳이 없는 이들은 자연스레 크고 작은 문제들을 일으키게 된다. 그렇다고 그들의 문제가 이해되어진다거나 외면해도 좋다는건 아니지만 사회구조가 그들을 엉뚱한 방향으로 분노케 했고 전혀 예상못한 곳에서 폭력, 특정인&집단 혐오 등 잘못된 방법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9. 특정 집단, 현상 혐오 발생
그리고 드디어 터질게 터졌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공격해대며 뜯어먹기 바쁘고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나 노인들을 무시하고 혐오하기 시작했고 기성세대는 그런 젊은 세대들을 예의를 모르고 버릇없다고 여기며 상종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와는 다른 그들을 이해하기 보다는 괄시하기 시작했고 배려나 이해보다는 선긋기와 마녀사냥이 시작되었으며 그들의 주장에 논리나 이성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2010년대 들어서 나홀로족은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 뿐만아니라 전 세계적인 추세가 되었고 이에 많은 사람들은 오프라인에서의 건강한 관계보다는 온라인에서 익명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정상적인 관계에서라면 억눌렀을 감정이나 조심할 부분까지 스스럼 없이 드러내며 뒤틀린 자아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특정 상대를 맹비난하는 혐오로 변질되어 버렸다.
과거에는 사람들 개개인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설사 그랬다고 하더라도 그런 목소리가 파급력을 가지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라도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고 이에 동요된 사람들은 그의 의견에 지지하며 함께 할 수 있다. 몇 일이 걸리거나 극도로 계산된 계획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분위기만 잘 탄다면 수 시간내에 자신의 의견이 수 천, 수 만명에게 전파될 수 있고 단기간에 영향력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를 좋은 쪽으로만 이용하면 좋겠지만 누군가, 무언가를 혐오하는 창구로 이용한다면 삽시간에 사회 이슈가 되는 것은 그저 시간문제이고 그 파급력도 엄청나다. 이 모든게 개개인이 대중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시대이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이다.
누군가를 싫어하고 피하고 싶을 때 대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직장동료, 친구, 가족 등 주변사람들에게 알린다. 자신의 불편하고 찝찝한 감정을 발설을 통해 해소하려는 것이다. 이는 굳이 따지면 정신건강에 좋다. 하지만 합리적인 이유없는 혐오와 혐오 행위의 집단화는 더욱 심각하고 절망적인 결과를 낳을 뿐이다. 개인의 혐오는 본능이다. 충분히 이해가능한 범위다. 하지만 지금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집단대 집단, 집단대 개인의 갈등은 그 어떤 칼보다 날카롭고 그 어떤 총보다 고통스럽게 심장을 관통한다.
그래서 무조건적인, 집단화된, 불필요하고 쓸데없는 거대한 이 시대의 혐오를 혐오한다. 범죄화된 집단 혐오를 일으키는 그들은 사실 갈 곳이 없는 공허한 영혼들이다. 그들도 결국 사회제도의 피해자들이라고 하기엔 이젠 좀 지나치다. 그들의 무의미한 혐오는 혐오하지만 부디 매몰된 감정선을 다시 끄집어내 이성을 되찾고 건강한 감정소비를 하는 날이 얼른 찾아오길 바랄 뿐이다. 남 탓, 사회 탓만 하며 집단혐오를 일삼기에는 고통받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다.
<메인 이미지 출처: http://www.lhrtimes.com의 Robert W. Borrowes 포스팅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