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꺽.'
선준은 보자기에서 얼른 일령을 꺼내 쥐었고 자령 역시 활을 집어 들었다.
'찌이이. 찌르르르르르르.'
일령의 상태를 보니 필시 여기는 이승이 아니었다. 이곳은 이승을 떠난 영들이 저승으로 가기 전 머무는 이승과 똑같은 형태의 다른 세계, 영계였다.
"똑같구나. 이 집도, 대벽 마을도."
"그러게요. 그런데 다른 게 있다면 여긴 귀신들이 사는 곳이구요."
"어서 가보자. 네 아버지를 찾아야지."
셋은 곧 은진의 집을 빠져나왔다. 마을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깜깜한 밤을 비추는 건 오직 멀리서 번쩍이는 불빛들과 밝은 달뿐이었다.
'저벅저벅. 스스스스'
'저벅저벅'
'스스스스스'
"아재, 아재 들었능교?"
행장이의 속삭임에 선준과 자령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움직이는 소리야. 어쩌면.."
"어쩌면..? 뭐 당가요 아재?"
"우리에게 다가오는 소리..?!"
멀리서부터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처럼 들리던 수상한 소리는 어느새 스무 길(약 60미터)도 안 되는 뒤쪽과 양옆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어..??!! 저건 도대체 뭐야?"
"어.. 어? 흐아악!!"
선준의 한마디에 뒤와 양옆을 돌아본 일행은 어느새 그들 근처까지 다가온 무언가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까맣고 희뿌연 것들이 마치 검은 파도처럼 일렁이는 형태로 뒷산에서부터 그들을 향해 물밀듯이 밀려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 뛰어!"
선준이 외치자 가뜩이나 잔뜩 겁에 질린 자령과 행장이가 앞을 향해 전력을 다해 뛰었다.
'헉헉. 저것들의 속도가 더 빨라. 이러다 꼼짝없이 잡히겠어.'
그사이 검은 파도와 같은 일렁거림의 너비는 일 리도 넘게 커졌다고 속도는 더 빨라졌다. 선준은 모두의 안전을 위해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대로 쉽게 당할 순 없지..!’
선준은 달려가는 자령과 행장이를 뒤로한 뒤 일령을 꼭 쥐고 전방을 향해 외쳤다.
"일령, 광!"
'츠와아아앙-'
선준의 호령과 함께 일령에서 태양빛과 같은 작렬하는 섬광이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사방이 대낮처럼 환해졌고 덕분에 선준은 삼방에서 그들을 향해 쫓아오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아아.. 아재 저것들이 다 뭐 단가요..?"
검은 파도 같은 일렁 거림 때문에 도깨비불이나 광령으로 생각했던 선준은 그 아래 숨은 수백의 끔찍한 원귀들의 얼굴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여귀 떼(‘려'라고도 불리며 보통 비명횡사한 사람들이 원귀가 되어 전염병 등을 퍼뜨리며 어지럽힌다.)잖아.. 지박령들까지 한데 뭉쳐 세가 더욱 커졌어..!'
"얘들아, 더 달아나기 힘드니 저기 담벼락 뒤로 숨거라!"
자령은 곧바로 담벼락 뒤에 자리를 잡은 뒤 부적으로 만든 활촉을 가진 활을 몇 개 꺼내 시위를 당겨 전방을 겨누었고 행장이는 그 옆에서 달달 떨며 선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길, 저렇게 숫자가 많다니.. 대벽산의 밤보다 더 하잖아. 여기가 영계가 맞긴 맞구나.'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요..! 선비님 어떻게 할까요?"
뒤에서 자령이 소리쳤다. 하지만 선준은 가장 적절한 때를 살필 여력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여귀 떼의 수는 너무 많았고 이럴 땐 최대 물량으로 무작위로 공격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냥 막 쏴요. 저기 검은 물결 안으로 마구잡이로 쏴요..!"
'휙-'
'휙휙-'
자령의 활솜씨는 뛰어났다. 자령이 쏜 화살이 검은 물결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마다 찢어질듯한 비명과 함께 서너 명의 여귀가 화살과 함께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하얀 구멍이 생겨났다.
선준 역시 일령의 기운을 최대한 끌어모으고 있었다. 한 번의 일격으로 전방에서 밀려 내려오는 여귀 무리는 모두 제압해야 했다.
'어차피 하나하나는 강한 녀석들이 아니야. 그러니 저렇게 뭉쳐 다니지.'
"일령, 활!!!"
선준이 전방을 향해 일령을 쥔 손을 내밀자 삽시간에 희미한 노란빛을 띤 수십 개의 화살이 허공에 장전되더니 선준이 일령에서 검지를 놓자마자 전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세차게 가르며 날아갔다.
"우와.."
이는 선준의 뒤에서 두려움에 떨던 행장이도 일령의 활을 처음 본 자령도 놀랄 정도로 장관이었다.
'파바박-'
'퍼벅. 파바바바바박-'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곧 귀를 찢을듯한 비명 소리가 끔찍한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전방의 검은 물결이 일시에 커다란 하얀 구멍이 되어 사라졌다.
"우와, 역시 우리 아재! 엄청 멋지구만요. 이제 몇 번만 더 공격하면.."
자령 역시 울타리에 숨었다 밖으로 나와 전방을 살폈다. 그리고 나머지 양옆의 여귀들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진짜 있긴 있군요. 이런 것들이.."
하지만 여전히 양옆의 여귀 떼도 수가 만만치 않게 많았다. 아직 안심하기엔 일렀다.
"활!"
선준은 양옆의 검은 물결 쪽으로 수십의 활을 더 날렸다.
'슈수숙. 슈숙-'
'끄아아아아. 끼아아아아-'
선준의 공격과 자령의 후방 지원으로 당장 눈앞에 보이던 일렁거림 들은 소실되듯 사라졌다. 이대로 금방 위기를 넘길 수 있어 보였다.
"한시름을 놓았구나. 수고했다. 모두"
"선비님 덕분이죠."
"아재, 그럼 이제 귀신들을 다 잡았당가요?"
선준과 자령이 삽시간에 여귀 떼를 제압해 모두가 안심을 할 때였다.
'슈와악. 슈아아아악-'
반 리도 안되어 보이는 대벽산 자락의 입구 근처에서 분명히 모두 사라졌다고 여긴 여귀 떼가 땅 여기저기서 쑤욱 쑤욱하고 올라오더니 또다시 그것들끼리 엉겨 붙어 검은 물결을 만들어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선준 일행을 향해 밀려내려 오기 시작한 것이다.
"으아아, 아재 아재.. 저, 저것들이 다시.."
이를 먼저 발견한 행장이가 놀라 커다란 두 눈이 더 동그랗게 겁에 질렸고 자령은 얼른 다시 화살을 서너 개 꺼내 동시에 장전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활촉을 가진 화살이었다.
"부적을 태운 가루를 같이 녹인 활촉이래요. 은진 씨가 하나당 열은 뚫을 거라는데.. 두고 보죠.”
자령의 말에 선준은 고개를 끄적였다.
'휘휘휙-'
자령이 쏜 화살은 과연 즉각적인 효과가 있었다. 검은 물결 속으로 날아간 화살이 아까보다 더 큰 하얀 구멍을 만들었던 것이다.
동시에 선준은 여귀 떼를 향해 뒤돌아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일령, 풍(風)"
"휘이이이이이이이-'
그러자 순간 일행의 다섯 자 앞에서부터 돌발적인 강한 돌풍이 일더니 맹렬한 속도로 검은 물결을 향해 날아가 물밀듯 밀려 내려오는 수 십의 망령들을 한참이나 뒤로 날려버렸다.
선준의 공격과 동시에 여귀 떼의 움직임이 주춤했고 선준 일행은 이를 놓칠세라 다시 마을 쪽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재 아재, 이제 어디로 간당가요?"
"일단은 피하자! 백귀로 씨를 찾아야 하나 당장은 위기 모면이 우선이다. 가자!"
선준 일행은 내리막길을 따라 한참을 달려갔다. 때는 한창 어둠이 내린 야심한 밤이었지만 사방은 희뿌연 하게 발광하는 무언가가 끼인 듯 흡사 초새벽녘의 분위기와 같았다.
"헉헉. 이제.. 이제 안 쫓아오겠지?"
"그러게요. 헉헉."
어느덧 마을을 중앙에 위치한 시장 입구까지 도착한 일행은 잠시 담벼락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오긴 올 거야.. 대신 좀 천천히 오겠지."
선준 일행은 잠시 숨을 고르며 피할 곳을 찾고 있었다.
"으아아.. 으아악!"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던 행장이가 갑자기 또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닌가.
"왜 그러냐, 자야."
"저.. 저, 저기요. 아재.."
행장이가 가리킨 골목에서 무언가 기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 몰골이 너무 선명하게 흉측하고 기괴한 나머지 비명을 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화근이었을까. 행장이의 비명은 기괴한 몰골의 요괴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선준은 일령을 꽉 쥐었다. 어차피 저것이 무엇이든 일령으로 베어버릴 심산이었다.
'어, 어.. 뭐야?'
골목에서 기어 나오던 요괴를 바라보던 선준은 갑자기 사방을 둘러보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숱하게 많이 봤던 역귀와 마귀는 물론, 원귀로 보이는 녀석들이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어슬렁거리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