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1일 월요일
오늘은 글을 쓸 계획이 없었지만 부업이 예상보다 일찍 끝나 세탁소까지 다녀왔는데도 시간이 남는 터라 키보드를 잡게 됐다. '펜을 들다'가 아니라 '키보드를 잡다'는 멋이 없게 느껴지지만. 침대에 늘어져 있는데 무작위로 선곡한 재즈에서 프랭크 시나트라 노래가 흘러나왔다.
시나트라는 멋스럽다. 수사자처럼 우아하며 능청스러운데, 그와 동시에 어딘가 참을 수 없는 무료함에 울적한 목소리도 하고 있다. 마초적인 사람에게 거부감이 있는 편이지만 그는 아주 좋아한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목소리는 몹시 특별하지만, 그라는 인물 자체는 굉장히 전형적이라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1950년 대적인 요소를 모두 갖고 있다. 그는 적절히 친근하고 적당히 시니컬한 동시에 유머러스하며 쿨했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도시의 형태가 막 완성될 무렵, 시나트라는 뉴욕이 왕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찾아왔다. 전쟁과 학살이라는 무참한 방식으로 과학의 발달을 확인한 미국인들은 무한한 자신감을 품은 채 자아도취에 흠뻑 취해 있었다. 50년대의 광고와 영화, 음악, 패션에서 그려지는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 행복에 대한 이미지는 의심의 여지없이 확고하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살던 그들도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 거짓말이라는 거. 2019년이라는 말로면 모든 게 가능할 것만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에도 비참함을 알고 있는 우리처럼. 70년 전 그들 또한 세상이 보여주는 세상과 내가 겪고 있는 세상 사이의 괴리에 상처 받고 있었다는 걸, 지금도 관심 갖고 찾아만 본다면 다양한 화법의 여러 이야기로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누구보다 우아한 방식으로 노래를 부를 줄 알면서도 성적으로 난잡하고 폭력적인 프랭크 시나트라를 볼 때면 50년대와 참 어울린다고 느껴진다.
물론 그의 그런 면을 정당화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말하고 싶은 건 나나 시나트라나 그가 살던 세상이나 내가 사는 세상이나 그대로 쭉 아이러니로 가득 차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의 사회원인 우리는 사회화되기 위해 지금의 시스템을 숙지하고 적응하며 살아가지만 사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은가. 세상이 처음 보여주던 것과 달리 훨씬 엉망이고 최악이라는 걸. 그 판 위에서 인간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 무언가를 깨끗하게 논하기엔 뭐랄까, 애초부터 어딘가 모순이 있었다고 느껴진다.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불안과 공허에 대해 얘기하는 프랭크 시나트라처럼 나는 모두가 속으론 알고 있다고 믿는다. 전부 거짓말이고 엉망이라는 걸 알면서 나아지지 않을 걸 알기 때문에 끝임 없이 불안하게 진동하면서 찰나 짧게 기뻐하며 살다 가겠지. 하는 생각을 했을 때 조금 위안이 된다고 하면, 너무 악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