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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꾸준 Oct 28. 2022

[이건 못 참아] 7. 약속

약속은 소중해서 참을 수가 없다.

초등학생 때,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아마도 일요일 오후 2시였을 것이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우리는 함께 문방구를 가기로 했다. 당시 500원이면 조립식 장난감을 하나 구매할 수 있었는데, 이 장난감을 함께 구매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매주 토요일이면 나는 실내화를 빨았다. 문방구에서 파는 고무신 같이 생긴 하얀색 실내화는 일주일이면 군데군데 검은색 얼룩이 졌다. 뒷 베란다에서 작은 의자에 앉아 실내화에 물을 뿌려 적신다. 그리고는 세탁용 솔에 빨랫비누를 묻혀 실내화에 묻은 얼룩들을 열심히 닦았다. 그렇게 얼룩을 지우고 거품을 물로 헹군 후에 앞 베란다에 잘 세워서 실내화를 말렸다. 이 과정을 거치면 어머니께서 용돈으로 500원을 주셨다. 그럼 그 500원으로 문방구에서 파는 작은 조립식 장난감을 살 수 있었다. 나에겐 큰 행복이었다. 그 낙을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친구와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일요일 오후 2시에 태경 아파트 상가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비가 참 많이도 내렸다. 몸집보다 큰 우산을 들고는 친구를 기다렸다. 우리가 가려고 했던 문방구는 문남초등학교 후문에 있었다. 물론 문방구는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 집 건너편에 있는 유천아파트 상가에도 2개나 있었고, 학교로 올라가는 길에 대명아파트 상가에도 1개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장난감은 문남초등학교 후문에 있는 새싹 문구에 있었다. 태경 아파트에서 12분 정도 걸어가야 했다. 내리는 비 사이로 친구가 보이기를 1시간 정도를 기다렸던 것 같다. 나는 친구의 집이 어딘지도 정확히 몰랐고, 전화번호도 몰랐다. 그저 약속만을 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혼자 그 문방구에 가서 장난감을 사서 돌아왔다. 다음날 학교에서 그 친구를 만났다. 어제 왜 나오지 않았냐고 물었다.


"까먹었."


그 친구는 나와의 약속을 까먹었단다. 불과 하루 전에 한 약속이잖아. 토요일에 했던 약속이잖아. 내가 먼저 그 얘기를 꺼내기 전에 네가 먼저 와서 나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잖아. 왜 네가 잘못한 건데 내가 1시간을 비 오는 날 신발 속 양말이 다 젖을 때까지 기다렸어야 하는 건데. 왜 내가 실망해야 하고, 기분이 상해야 하는 건데. 까먹었으면 다야? 지금 와서 생각나는 이런 말들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고, 그때의 나는 그저 알았다고 했다.


누군가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기분이 상했던 첫 번째 기억을 떠올리면 항상 이 날 우산을 쓰고 친구가 오길 기다리던 어린 시절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난 어릴 때부터 예민하고, 쉽게 상처받는 소심한 아이였다. 왜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고등학교 때 함께 농구를 하면서 아주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성격도 유하고, 재밌고, 낯가림도 없고, 농구도 꽤 잘했다. 같이 있으면 항상 웃게 되고, 우리에게 화도 한 번 낸 적이 없는 친구였다. 항상 잘 맞춰주었고, 술을 좋아했지만 담배는 태우지 않았다.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약속시간에 항상 늦는다는 것이다. 약속시간을 제대로 맞춰서 나온 적이 거의 없다. 2시에 만나기로 하면 2시 30분에 나온다. 2시 30분 도착이 아니고 출발이다. 어디냐고 물어보면 거의 다 와간다고 거짓말을 한다. 나는 기분이 나빴다. 왜 맨날 늦게 오냐고 물어보고, 화도 내 보았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저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20대 초반에도 친하게 지내며, 농구도 자주 하고, 술도 자주 마시고, 노래방도 자주 가서 랩도 함께 부르고 했다. 여전히 약속시간을 지키지 않는 채로.


그 당시에 읽은 어떤 책에 그런 말이 있었다. 그 사람이 늦는 것이 아닌 함께 있을 때 즐거운 시간에 집중하라는 식의 내용이었다. 책의 저자가 든 예시는 나와 아주 비슷한 상황이었다. 함께 있으면 너무나 행복하고 재밌는 친구가 있는데, 항상 약속시간을 지키지 않았다. 처음엔 그게 싫어서 그걸 고치려고 했지만, 이제는 그걸 이해하고 그 친구의 좋은 점을 떠올리기로 했다. 함께 있는 시간이 행복하면 됐다. 하는 식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아! 그렇구나 싶었다. 그래. 내가 너무 예민하고 그저 상처를 잘 받기 때문에 그랬던 거구나. 그 친구랑 있으면 즐거우니까 그 친구는 좋은 친구구나.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생각을 하려고 해도 내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친구는 좋은 친구가 아니었다. 내가 약속시간에 늦는 걸 그렇게 싫어하는 것을 수차례 얘기했는데,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계속해서 한다는 것은 좋은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 친구와 함께 있는 시간이 재밌어도, 함께 있기 전까지 불쾌하고 화가 났으니까. 그 친구는 나를 그저 기다리게 함으로써 내 시간을 앗아갔다. 그 정도 기본 예의도 없는 친구가 좋은 친구 일리 없다. 나는 그만 상처받기로 했다. 그 친구와는 약속을 잡지 않게 되었고, 만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마음이 편해졌다. 더 이상 애써 그 친구를 좋은 친구로 남겨두지 않아도 되니 참 마음이 편했다.


성인이 되어 만난 사람들도 참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학교 조별과제를 하면 제시간에 자료를 보내지 않는 학생들도 많았다. 물론, 나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를 펼친 것이었다. 조별과제는 내가 혼자 다 해도 괜찮았다. 회사에서 서포터스를 모집한 적이 있다. 본인들이 하고 싶다고 신청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막상 행사 당일이 되자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를 하니 '못 갈 것 같은데요?'라는 명언을 남겼다. 직원을 뽑기 위해 면접 일정을 잡았는데, 면접 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 사람도 있었다. 남의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약속을 지키지 못할 상황이 되면 최소한 본인이 먼저 연락이라도 해야 하지 않는가. 너무 비상식적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참여했던 한 모임에서 체육대회를 했다. 뚝섬 한강공원에 모여서 갖가지 기괴한 종목으로 승패를 겨루는 체육대회였다. 총 7명이 모이기로 했다. 한 분은 얼마 전 담낭 제거 수술을 하여, 경기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심판을 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6명이 3대 3으로 나눠 경기를 치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한 명이 나타나지 않았다. 약속시간이었던 오후 2시가 지났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났다. 우리는 준비된 여러 가지 기획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기다려야 했다. 나는 화가 났다.


"아니,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아직도 안 오시는 거죠? L님에게는 1시간이겠지만, 우리는 여섯 명이니 총 6시간을 낭비하게 하고 계시네요. 저희들의 시간도 정말 소중한데 말이죠."


화가 난 말투로 말을 꺼내자 모임에 함께 있던 분들이 나를 달래주기 시작했다.


"어! 용준님 화났다! 용준님! 여기 보세요!"


J님께서는 점프를 뛰며 두 발로 박수를 치는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자세를 취하면서 나를 달래주었다. 마치 울고 있는 아기에게 장난감 보여주면서 달래주듯이. 나는 참지 못하고 화를 낸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왜 내가 부끄러울까. 지각은 그 사람이 했는데. 나는 아직도 정신연령이 어린 상태로 멈춰있는 걸까. 다른 사람은 이 상황이 화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만 너무 화많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가 배려받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화가 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평온할 수 있지?


"L님! 늦었으니까 벌칙 수행하세요!"

"네 정말 죄송합니다. 어떤 벌칙을 할까요?"

"노래 불러주세요! 용준님 화 많이 났으니깐요!"


다른 분들이 먼저 L님에게 타박하면서 벌칙을 시켰다. 그러자 L님께서 정말 열심히 그 벌칙을 수행했다. 산들의 <취기를 빌려>를 틀어놓고 노래를 불렀다. 뚝섬 한강공원 어딘가에서 정말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그 모습을 보자, 화가 싹 가라앉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화가 사라졌다. 그분이 일부러 늦은 것이 아니고, 늦어서 정말 미안해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모두 많은 약속을 하면서 산다. 지키지 못할 혹은 지키지 않을 약속들을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라며 수도 없이 한다.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도 내가 뱉은 말은 최대한 지키고 싶다. 다음에 밥 한 번 먹자고 했으면, 밥 먹어야 한다. 다음에 영화 보자고 했으면 영화 봐야 한다. 다음에 바다 가자고 했으면 바다 가야 한다. 그렇다고 상대가 인사치레로 하는 약속들을 모두 지키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어느 날 약속을 지키지 않은 누군가가 괜히 머쓱했는지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거야.'라는 말을 하면서 어물쩡 넘어갔는데, 그 말이 참 싫었다. 지금도 싫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지.


여전히 약한 피부처럼 예민한 나의 성격은 유리처럼 깨진 약속의 조각들에 쉽게 상처 입는다. 그래서 난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참을 수가 없다. 그렇게, 참지 못하고 마침내 미워하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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