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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미 Sep 24. 2021

존 티처, 커피 라지 사이즈, 오케이?

나의 외국어, 너의 한국어

 1990년대, 바야흐로 세계화 시대가 도래했다. 해외여행자율화로 배낭여행이나 해외어학연수를 떠나는 젊은이가 많아졌고, 강남과 종로 일대의 영어 학원은 호황을 누렸다. 나 또한 외국어에 대한 호기심으로 KBS 오성식의 <굿모닝팝스>, EBS 이보영의 <모닝스페셜> 등의 영어회화 프로그램을 애청했다. 이러한 관심사는 영어회화 학원 등록까지 이어졌으며, 당시 한 달에 십만 원이 넘는 수강료를 지불한 뒤 세계화에 발돋음하는 첫 단계로 레벨테스트를 받았는데,


 Level 1


 한국에서의 6년 정규 영어 수업을 들으며 국수 중심으로 입시를 준비했던 내 영어실력은 그렇게 ‘왕초보’ 딱지를 붙이고 세상에 나왔다. 에비씨디이에프지, 알파벳 노래가 절로 나왔다. 콧노래가 아니었다. 좌절이었다. 나는 그렇게 바닥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매일 새벽 영어회화 학원으로 향했다. 


 6시 20분에 수업이 시작되는 새벽반 수업이었다. 수강생은 대부분 직장인이었고, 그들은 무척 피곤해 보였다. 미라클 모닝은 90년대 초중반 강압적인 세계화 물결에 떠밀린 직장인들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일지도 몰랐다는 생각이 이제서야 든다. 새벽 반에는 대학생들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매번 내 옆에 앉던 아저씨(당시 내 눈에는 그가 그렇게 보였는데, 편의상 그를 김 과장이라고 하겠다)와 짝 활동을 자주 했는데 그는 종종 내게 이렇게 물었다. 


“다이안, 와이 유 컴?”

 그는 다이안이라 불렸던 내게 “대학생이 뭐 하러 이 새벽에 영어 공부하러 와요?”라고 추정되는 질문을 건넸다. 그에 대한 내 대답은 이러했다.

 “저는 외국어에 관심이 많고 외국인들을 상대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영어를 잘해서 외국계 회사에 취업하고 싶습니다.”

 스무 살 대학 새내기의 포부를 똑부러지게 답하려 했으나 나 또한 그와 다르지 않은 레벨 1 학생이었으므로 간단하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 라이크 잉글리시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영어 실력이 좋지 않았고, 그나마 좋아하기에 학원이라도 나올 수 있었던 건 아닌가 싶었으니 이게 맞는 말이었으며, 나의 영어 실력이 여실히 드러나는 답이기도 했다. 사실 나는 영어 수업이 좋았다. 외국인을 만나는 일도, 연령이나 관심사가 다른 이들과 어울리며 영어를 쓰는 일도 좋았다. 아이 리얼리 라이크 잉글리시. 


어쩌면 나는 왕기초반에서 다른 수강생들보다 나이가 어렸고, 아는 사람도 없었으니 좀 더 용감하게 영어를 쓸 수 있다는 환경에서 그나마 위안을 얻었을지도. 그러나 김 과장은 달랐다. 그는 영어회화를 재미있어하지 않았고, 자신이 하필이면 그 시간에 책상과 합체된 좁고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는 이유도 찾지 못하는 듯 했다. 그런 그에게도 영어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왔다.


 그것은 바로 티타임이었다.

 학원에서는 한 달에 한두 번쯤 학원 근처의 커피숍에서 티타임을 갖곤 했는데 천 원 대 커피를 시키면 토스트 한 장을 곁들여 주는 곳이라 가성비도 좋고 공간도 널찍해서 근처 학원 수강생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처음 커피숍에서 ‘프리토킹’을 해야 한다는 말에 다들 조금 주눅든 목소리로, “네가 존 티처 옆으로 가.”, “아냐, 언니가 더 잘하니까 언니가 가.” 뭐 이런 말들을 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밀고 밀리는 순간, 우리의 김 과장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존 티처, 왓 유 드링크? 


 김 과장의 영어 발화에 존 티처는 다소 놀란 듯 눈을 두어 번 끔뻑였을 것이다. 그리고는 아메리카노라 말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누가 지목하지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말한 김 과장의 첫 번째 발화로 기억되었다. 김 과장은 존 티처의 주문을 재차 확인했다. 

존 티처, 커피, 라지 사이즈, 오케이. 


김 과장의 영어보다 더 놀라웠던 점은 존 티처의 한국어였다. 

당시 그는 한국에 거주한 지 십 년이 넘은 미국인이었으나 한국어로 주문조차 할 줄 몰랐다. 심지어 그는 자기가 한국어를 할 줄 몰라도 한국 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자랑처럼 말하곤 했다. 그는 한국에 십 년 넘게 살며 영어를 가르쳐 왔으니 우리들의 브로큰 잉글리시(broken English)나 콩글리시(Konglish)를 이해하는 능력은 뛰어났다. 그러나 한국어는 제대로 할 줄 몰랐다. 어눌한 발음으로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를 말할 뿐이었다 한국어를 쓰는 대한민국에 살고 일하며 돈을 벌면서도 한국어를 전혀 쓸 줄 모르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 긴 시간 동안 한국어를 배우는 것보다 안 배우는 것이 오히려 더 힘들지 않았을까?


 반면에 김 과장의 영어를 생각해 보았다. 그는 교실 안에서 존 티처를 등지고 앉아 있었으나 교실 밖을 나오니 존 티처를 향해 아주 자신감 있게 영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외국어는 어떻게 힘을 얻을 수 있었을까. 


그 날부터였을까? 

십 년 넘게 한국에 살면서도 한국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한 미국인과, 영어를 학창 시절 내내 배우고도 영어 회화 교실에서 잔뜩 주눅이 들어있었던 한국인에 대해 생각해 보았던 때가.


언어가 배워지지 않는 시점,

그리고 언어가 힘을 얻을 때란 과연 언제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김 과장과 나는 짧은 콩글리시로 대화하는 법을 조금씩 터득해갔다. 몇 달이 지나 김 과장은 “와이 유 컴?”에서 더 길게 이어지는 문장을 배우기 전 학원을 그만 두었고, 나는 “아이 라이크 잉글리시.”에서 몇 문장 더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이 될 무렵 미국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대학교 2학년 어느 가을이었다. 그때부터 다양한 이들을 만나며 나의 삶은 크고 작은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이십 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1990년대에 했듯이 세계화나 지구촌화를 부르짖지 않아도 우리는 주변에서 다양한 문화적, 인종적 배경을 지닌 이들을 마주한다. 


 신사동 중국집에서 서빙을 보는 아랍 청년, 택시를 모는 중국 동포, 명동 화장품 가게에서 일하는 일본 여성, 같은 아파트에 사는 베트남 엄마,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캐나다 남성,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동남아 청년, 성당에서 인사 드린 인도 신부님, 등 우리가 굳이 영상을 접하지 않아도 우리 옆자리에는 실시간으로 함께 일상을 보내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과 한국어로 대화한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우산입니다.”라는 교재 속 대화가 아닌, “이 스킨은 할인제품 맞나요? 포인트 적립도 해 주시죠?” 혹은 “신부님, 제가 고해성사 한 지 육 개월이 넘었습니다”와 같은 목적성 있는 대화를 주고 받는다.


 그리고 나도 변했다. 


 세계화, 지구촌화를 모토로 삼으며 영어 공부를 시작했던 영어학원 왕초보 반의 다이안은 조 선생이 되어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누구를 가르친다기보다 성장 배경이 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기도 하고 한국어와 문화를 함께 경험하며 그들과 어울리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고 하면 보다 정확한 설명이 될는지도. 


 나는 그 동안 다양한 환경에서, 그러니까 한국, 미국, 캐나다, 대만 등지에서 거주하며 현지인들과 함께 생활했고, 동시에 한국어를 현지인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해왔다. 그랬기에 외국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고, 현재도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을 하고 있으니 한국인보다 외국인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직업적인 특성으로 인해 내가 유난히 다양한 외국인을 많이 만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돌아보면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이유와 목적으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알려고 하는 이들이 적지 않으니 말이다. 


 나는 그들과 나의 모국어로 대화하며, 오래 전 나와 김 과장이 강남역 학원에서 구사했던 외국어와 존 티처의 한국어를 떠올렸다.

 그 당시 우리의 외국어는 에이비씨에서 시작되었는데, 존 티처의 한국어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아니 무엇 때문에 그는 한국어를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걸까. 이후 이십 여 년의 세월을 겪으며, 존 티처와 비슷한 사례를 종종 보아왔다. 미국에서 태어나 영어 학원에 다니는 청소년들, 캐나다에 이민 온 지 삼십 년이 되어도 상대의 모국어와 상관없이 중국어로 대화하는 중년 여성, 대만에서 짧게는 오 년, 길게는 십오 년 동안 현지에서 일하면서 중국어로 아주 기초적인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는 외국 국적의 교수들도 만났다. 


 물론 그 반대의 사례는 훨씬 더 많이 보아 왔다. 한국에 한 번도 간 적이 없었지만 독학으로 한국어 능력시험 중급(4급)에 합격했을 뿐만 아니라 나와 아무런 불편 없이 소통을 했던 대만 대학생들, 한국인 친구와 어울리고 싶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가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게 된 미국 학생, 가수가 되고 싶어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 오디션, 한국 연예인을 비롯해 한국 대중문화에 관심을 갖다가 한국 문화를 알리는 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캐나다 학생, 퇴사 후 한국에 와서 한국어를 배우며 몇 년 간 거주한 뒤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 한국 영화계 소식을 전문적으로 전하는 기자가 된 일본인, 생후 일 년이 채 되지 않을 무렵 미국으로 입양이 되어, 이후 한국어와 사물놀이를 배우며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애쓴 입양인들.


 그들에게 한국어는 결코 배워지지 않는 언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배우고 싶은 언어, 잘해내고 싶은 언어, 한국인과 혹은 한국어를 하는 이들과 소통하려는 언어였다. 우리의 외국어는 에이비씨에서 시작되었으나 그들의 한국어는 가나다에서 시작되지 않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에 대해 더 고민해 보았다.

 왜 그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지, 한국에 사는지 혹은 살아본 적이 있는지, 한국어를 배워 최종적으로는 어떤 일을 하고 싶어하는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고.


 그리하여 나는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계속)


* 대문 사진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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