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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미 Feb 23. 2022

너무 한낮의 통화

서운하다는 그 말,

전화가 왔다. 평소 낯선 번호로 오는 전화는 받지 않는다. 02로 시작하는 번호 중 근무하는 학교번호가 아니라면 거절 버튼을 누르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그 전화를 받아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영미 님, 맞으신가요?”

30대 초반쯤 되는 남성의 목소리였다. 평일 이 시간에 낯선 번호로 나를 찾는 30대 남성이 누구일까,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네, 맞습니다, 라는 대답을 듣자마자, 그는 아, 옅은 탄식을 내뱉고는 말을 이어갔고, 나는 그의 첫마디를 듣자마자 정신이 번쩍 뜨였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여성들이었다. 신용카드 개설 혹은 업그레이드 요청(그들은 해당 카드 실적이 좋지 않은 나를 VIP라 불렀다), 인터넷 회사 안내(우리 집 인터넷은 내 영역이 아닌 가상의 공간이란 생각에 신경을 써 본 적이 없고), 증권 계좌 안내(개설 후 일 년 넘게 거래 않을 증권 계좌를 연 건 오직 내 잘못이며) 등을 알린 이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모르는 남성의 전화가 보험 안내일 거라고 나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는 내가 조영미 본인이 맞는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자기가 앞으로 설명할 내용이 있는데 들어주실 시간이 되시느냐고, 한 문장에 두 번 이상 경어법을 붙이며 정중하게 물었고, 그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다. 문득 그가 이 일을 갓 시작한 사회초년생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마침 나는 ‘너무 한낮에’ 자연광을 맞으며 리클라이너 소파에서 쭉 편 다리 위에 노트북을 얹어 놓고는 이번 주까지 마감인 보고서를 쓰고 있었고, 바쁘기는 했지만 촌각을 다투는 일은 아니었기에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그는 나의 호응에 상당히 만족스러워하며 자,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라는 준비 땅, 신호를 알리며 빠른 속도로 말을 시작했다.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노트북에서 보고서를 쓰던 나는 동일한 파일 위에 그의 말을 그대로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보험회사에서는, 갑상선암, 자궁경부암, 유방암, (못 들음), (못 들음) 이 다섯 가지

3천만 원씩, 총 1억 원까지 보장해 드립니다. 돈 걱정 없이 치료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드립니다.

생식기암뿐만 아니라 깨알만 한 암도 가리지 않고 약관에서 보장한 대로 3천만 원을 3일 안에 지급해 드립니다. 총 2억 3천만 원 (못 들음)

기존의 암보험과도 중복보험이 있더라도 보장해드립니다. 암보험만으로도 살아계시는 동안 (계속 못 들음) 보험료가 가장 중요하시겠죠? 이건 그렇게 비싼 게 아니라 4-5만 원대 가성비가 너무 좋다 보니까요 하루에 10분 정도만 해드리거든요. 고객님 오 년 안에 입원 치료하신 적 없으시죠?


마음 같아서는 다 받아 적고 싶었는데 워낙 빠른 속도로 말을 했고, 심지어 중간중간에는 발음이 부정확해서 알아듣기가 어려워 저 정도에서 멈췄다. 무엇보다도 그가 내게 입원 치료를 한 적이 없느냐는 질문에서부터 대답을 요하는 문장이 나와 타이핑이 어려웠다.


네네.


그는 나의 대답에 상당히 흡족해했다. 나는 입원 치료, 수술도 최근에 한 적이 없었기에 그가 말한 기준(가성비가 좋은 보험이라 하루 딱 10분만 모실 수 있는)에 딱 맞는다고 했다. 뭔가 칭찬을 들은 기분이라 기쁘기까지 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그의 말을 더 듣고, 질문에 대답을 한다면 그가 오늘 정한 10명 안에 들어야 하는데, 나는 보험을 들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말고 전화를 끊었어야 했을까. 나를 포기하게 하고 다른 고객님을 찾도록 시간을 벌어줬어야 했나, 아니면 그래도 그가 준비한 말을 끝까지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맞았나….




나는 요즘 사람이 점점 무서워지고,

사람과의 접촉이 두려워지고,

사람에게 다가가는 내가 두렵다.


코로나 때문이었을까.

사람들과의 접촉이 뜸해지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사람을 대하는 일에 자신감이 떨어졌다. 상대를 향한 내 웃음이 진짜 웃음처럼 보이지 않기도 하고, 상대를 위한 배려가 그저 내 욕심이나 욕망의 다른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너한테 이걸 해주니까 너도 나한테 이걸 해줘야 하지 않겠어, 뭐 이런 거.


그래도 가끔은 상대에게 조건 없이 친절을 베풀지만 상대는 내 마음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친절을 보였던 내 행동을 다시 리플레이하는 대신 리와인드하고 싶어 진다. 그 마음의 근원이 무엇이었을까 살펴보았는데,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웃으며 사무실을 나왔지만 씁쓸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다희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기다려서 오히려 부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서운하다는 감정에는 폭력적인 데가 있었으니까. 넌 내 뜻대로 반응해야 해, 라는 마음. 서운함은 원망보다는 옅고 미움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런 감정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싶지 않았다. 자동차는 어둠 속을 천천히 달렸다.        -    최은영 단편 <일 년> 중


그 마음의 근원은 서운함이었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한 움큼의 마음을 주었으니 너는 한 움큼만큼 웃어줘야 하고 기뻐해줘야 해.

나의 마음에는 상대의 반응을 선택하고자 한 ‘폭력적인 데’가 있었다.

종종 이런 마음이 쌓였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이 점점 무서워지고, 사람과의 접촉이 두려워지고, 사람에게 다가가는 내가 두렵고, 그랬나 보다.



오늘은 아무 조건 없이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가 내게 잠시 자기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느냐는 물음에 나는 좋다고 대답했고,

내게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의 말에 경청하며 타이핑까지 했을 것이다.

준비한 안내를 고객님에게 A부터 Z까지 전달하고자 한 사회초년생의 떨리는 목소리가 나를 잠시 잡아두었는지도.



너무 한낮의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너에게 가졌던 서운한 마음도 오늘 오후 그렇게 끝이 났으면 좋겠다.




* '너무 한낮의 통화'는 김금희 소설집 제목이자 표제작 단편 '너무 한낮에 연애'에서 왔습니다.

** 대문 사진 출처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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