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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완 Mar 23. 2017

많이 먹어서 죄송합니다

야매 득도 에세이 #14







문득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최근에 겪은 것 중엔 '성시경'사건이 최고였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차창 밖 야경은 아름다웠고, 기사님이 틀어놓은 라디오에선 성시경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분위기에 취했던 탓일까? 무방비 상태에서 노래를 듣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아, 목소리 좋다'라고 생각해버린 것이었다. 아아... 올 것이 왔구나. 성시경의 목소리를 감미롭다고 생각하다니. 내가? 나 남잔데. 미쳤어 정말.

성시경의 노래를 그렇게 많이 들었어도 단 한 번도 좋다고 생각한 적 없었던 내가. 나이가 들면 여성호르몬이 많아진다고 하더니, 이건 내가 아니고 호르몬이 좋아하는 거다.

그날 나는 여성호르몬에 지지 않기 위해 액션 영화를 시청했다.


요즘은 내 나이가 적지 않음을 타인을 통해 느낀다.

가끔 그림 의뢰 때문에 출판사 에디터들과 미팅을 할 때가 있는데 신나게 수다를 떨다 보면 어김없이 이런 질문이 날아온다.

"저, 죄송한데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나이를 물어보는 게 딱히 실례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물어보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잊고 있던 나이가 생각나서다. 내가 몇 살이더라? 뭐? 벌써 그렇게 많이 먹었어? 이런. 창피하구만. 아.. 말하기 싫다.

간신히 부끄러운 두 자리 숫자를 말하면 또 어김없이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전혀 그렇게 안 보여요. 완전 동안이시네요."

아, 위로다. 출판사 에디터분들은 이렇게 마음이 착하다. 고맙지만 실제 동안인지 아닌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내 나이가 '그렇게 안 보여요'에서 '그렇게'인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나는 왜 내 나이가 창피할까.

누구나 나이를 먹고 늙어 가는 것인데. 그런 것들이 창피하고 부끄러울 이유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 이런 마음이 생기는 걸까.

아마도 그런 마음 바닥엔 '이 나이 먹도록...'이라는 정서가 깔려 있는 것 같다. 이 나이 먹도록 이룬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젊을 때 했던 실수를 계속 반복하고, 후회하고, 또 방황하는. 그런 나라서 나이 먹은 걸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게 아닐까. 사람마다 각자의 속도가 있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정작 나는 '이 나이 먹도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니. 나도 모르는 사이 조바심을 내고 있었나 보다. 나이를 먹을수록 누군가 쫓아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나뿐일까.


나이 먹어 생기는 조급함을 줄이기 위해 내 나이를 줄이기로 했다.

주민등록상의 실제 나이를 줄일 수는 없지만 스스로 어리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의 내 나이를 생각하면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지 뭐 이런 쓸데없는 걸 쓰고 있어? 아직도 청춘인 줄 알아?'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내가 십 년만 젊었어도'라는 말을 하는 건 다 그런 이유다. 도전해 보고 싶은 일이 있는데 나이가 들어서 못한다라는 말은 얼마나 슬픈가.

나는 주로 인터넷을 통해 그림을 알리고, 글도 쓰고, 일도 주고받으니까 인터넷의 가면 뒤에 숨어 나이를 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면 뒤에 숨어 악플을 쓰지만 않는다면 가면도 꽤 유용한 도구가 된다.

우선 나이를 정해야지. 돈은 안 되지만 재미있는 일을 해봐도 괜찮은 나이는 몇 살일까. 마음 같아선 20대로 해버리고 싶지만 그건 너무 염치가 없고. 그래 서른두 살이 좋겠다. 아, 진짜 그 나이로 돌아간다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때는 그걸 왜 몰랐을까. 어쨌든.

나이는 정해졌다.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 몇 년 하다가 돈은 안 돼도 재미있는 일을 하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하는 서른두 살의 남자. 그게 내 콘셉트이다. 누구를 속이기 위함이 아니고 나 자신을 속이기 위함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믿어 준다면 감정이입이 더 잘 될 것 같긴 하다. 부탁한다.

그렇게 콘셉트를 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 난 아직 젊고 시간이 많아. 겨우 서른두 살이잖아. 실패해도 괜찮아. 그렇게 용기를 내어 직장을 그만두고 이 에세이를 시작했다. 에세이 하나 쓰는데 무슨 용기가 필요하냐고 물을지도 모르지만 내 나이가 되면 이런 것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해야 할 이유는 한 가지인데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치니까 말이다.


우리의 영혼은 늙어가는 육체에 갇혀있다.

내 영혼이 아무리 자유롭다고 한들 나이 먹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가끔은 나이를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특히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는 말이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도 있다.

예를 들면 플레이리스트가 하나 더 늘었다는 것. 누구의 노래인지는 말하지 않겠다.

성시경 씨, 언제 술 한잔해요. 당신의 목소리에 취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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