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
오늘따라 이 시간 맥도널드에 왜 십 대 학생들이 북적북적할까. 아. 그러고 보니 개학식 날이었나? 일찍 마치고 단체로 아침들을 먹으러 온 걸까. 교복이나 체육복을 입은 아이들이 얼핏 보아도 스무 명은 족히 된다. 걷잡을 수 없이 홀 안을 메운 틴 스피릿이 귀청을 때린다. 지난번 이 앞을 지나다가 이쯤이 맥모닝 판매 시간이라는 걸 알아채고 한 번 먹었는데, 익숙하고 기름진 식사에 뜨거운 커피 한 잔이 몸 쓰는 일을 막 마친 아침 허기를 채우기 나쁘지 않아서 또 먹으러 왔다. 그러니까 그때는 맥도널드가 고즈넉하리만치 평화롭던 기억이다. 손님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리 붐비지도 않았던 것.
한데 오늘은 마침 장날이었다. 여학생 남학생 할 것 없이 입들 또한 참 걸다. 내용을 알 수 없는, 딱히 내용이 연결되지도 않는 것 같은 잡담으로 테이블을 쳐 가며 천장이 떠나가라 뿜는 웃음 사이로 들리는 추임새와 감탄사는 거의 비속어다. 인터넷 방송 영향도 있으려나. 하긴 내가 십 대일 때도 많은 아이들이 습관처럼 썼던 것 같긴 한데.
나한테 하는 게 아니어도 아침부터 욕을 듣는 건 유쾌할 리 없어 반쯤 먹은 맥머핀이 얹힐 것 같다가 어느 순간엔 시끄럽게 지저귀는 어린 새 무리 같아서 우습기도 하다. 흘끔 보니 모습들은 어찌나 귀엽고 예쁜지. 귀에 들리는 소리가 저들 전원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유독 목청 좋은 애들, 자기네들 안에서 좀 더 힘이 있거나 좀 덜 예민한, 좀 더 신명이 넘치는 애들의 소리로 차 있을 테다. 어디에나 조용한 아이들은 섞여 있기 마련이니.
교복 입을 나이의 학생들을 대중교통이나 좁은 보도에서 마주치는 일은 내겐 좀 긴장되는 일이기도 하다. 씩씩한 너덧이 무리 지어 갈 때에 그렇다. 발성 조절이 잘 안 되는 건지, 할 생각이 아직 없는 건지 무심코 곁을 지나다가 고함 세례를 받기도 하고, 이들의 몸짓 역시 당최 예측불허라 언제 어깨빵을 당할지 모른다. 그 나이 아이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전혀 아니고, 설령 그런다 한들 어쩌다 한 번 있는 일로 오버해서 겁을 집어먹는다는 뜻은 아니다. 아이들이니까, 그럴 나이니까. 다만 그건 그거고, 그들 곁을 지날 때 내심 움찔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만큼 살았어도 내 과민한 감각이 어딜 가지 않는다. 아이를 키워 본 적도, 가까이 접할 일도 없어 더 이렇게 되었을까. 삽시간에 쉬는 시간 교실처럼 변해 버린 맥도널드 귀퉁이에서 학생들을 통솔하는 모든 종류의 선생님들과 아이 키우는 부모님들께 존경을 표해 본다.
한편으로는 올챙이 적 생각도 불쑥 떠오른다. 교복을 입고 걷는 걸음마다 미성숙을 뚝뚝 떨어뜨리고 다니던 나. 나는 입이 걸거나 목소리나 행동반경이 큰 유형은 아니었으나 결코 어리숙함으로는 지지 않았다. 말수가 적어 그렇지 친구들끼리 비속어 또한 조금은 사용했고. 떠오르면 부끄러움 반 안쓰러움 반으로 꽉 차 버리는 시간. 그래서 그랬나. 길에서 저 나이 또래 아이들 마주치면 그들만의 에너지에 감탄하면서도 스멀스멀 한쪽 속이 쓴 이유가 이거였는지도 몰라. 아직도 어른이 덜 됐다.
뭔가를 관찰하며 글로 써 보면 안 보이던 어여쁨이 발견되기도 하고, 웬만하면 시선을 곱게 단장하고 싶은 욕구도 피어오르기 마련이라 쓰기 시작한 글이었다. 그렇게라도 소음을 견뎌 보려는 속셈으로. 그러나 오늘은 둘 다 실패한 듯! 그냥 느껴지는 대로 적어 버렸다. 어쩌면 있는 그대로 쓰는 연습이 내게 더 필요한 부분이기도 한데, 맥모닝을 먹으며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이들이 끊임없이 들락이고―조를 나눠서 오는 건지 몇이 다 먹고 나가는가 싶더니 새로운 아이들이 또 자릴 채우고―웃음과 욕설의 불협화음이 이젠 가히 대규모 합창 수준이라 이 몸은 이만 자리를 뜨련다. 그 한때 입에 붙은 거친 말이 오래가진 않길, 친구를 향하진 않길 자그맣게 바라며. 마침 해시 브라운의 마지막 한입도 삼켰다. 부디 건강하게 자라다오.
Seine
(3월 4일 아침에 씀.)
<지금부터 쓰지 뭐>는 2023 브런치북 『지금부터 하지 뭐』에 이어지는 '쓰기'에 관한 그림에세이입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never-or-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