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고도 주황빛이 도는

독립출판물 <깜깜과 어스름의 사이>

by 흣쨔

* 2021.04.05에 출간된 독립출판물 <깜깜과 어스름의 사이>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연재합니다.

독립책방 스토리지북앤필름(해방촌, 강남점), 망원 이후북스, 공릉 지구불시착, 인천 북극서점, 원주 책빵소에 입고되어 있습니다.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진한 갈색 벽돌집에, 아이는 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집에서 아이는 엄마를 기다렸다. 엄마의 엄마, 할머니의 집에서 아이는 엄마를 기다렸다. 학교를 마치고 플룻 학원을 가지 않는 날이면 아이는 온종일, 해가 질 때까지 그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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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에서 아이는 많은 꿈을 꾸었다. 서울에 간 이모의 방에서 영화 그랑블루 퍼즐을 보며 푸른 바다 꿈을 꾸었고, 서울에 간 외삼촌의 방에서 각자의 연극을 마친 인형들과 함께 재미난 모험 꿈을 꾸었다. 따뜻한 햇볕 아래서 아이는 곤히 잠들기를 좋아했고, 할머니는 아이에게 따뜻한 이불을 덮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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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꿈에는 많은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엄마. 할머니는 부엌에서 칼질을 하고 계신다. 주황색 울퉁불퉁한 당근 껍질을 벗겨내고, 썩뚝썩뚝 잘라 오봉에 담는다. 통통하게 잘 익은 애호박을 깍둑깍둑 잘라 당근 옆에 둔다. 하얀색 밀가루를 탈탈 붓고, 물을 섞어 반죽을 치댄다. 보글보글 육수 냄새가 퍼지는 부엌으로 아이는 달려온다. 할머니 앞에서 알짱대며 당근을 하나 집어 오도독오도독 먹는다. 함께 찡긋 웃으며 아이는 반죽을 건드려본다. 작은 손가락 자국 하나가 찍힌다.


아이는 얼굴을 찡그린다. 먹다 만 당근을 내려놓고 할머니에게 입을 크게 벌려 보인다. 할머이- 이 흔들른다-. 할머니의 주름진 손가락이 아이의 입으로 쑤욱 들어오더니 흔들리는 이를 사정없이 건드린다. 제법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곧 빠질 것 같다. 할머니는 조금 있다 이를 빼자며 일단 놀고 있으라 하신다. 아이는 무섭지 않은 척 하며 큰방으로 들어간다.


아이는 혼자서도 잘 놀았다. 대본을 쓰고, 자기 몸보다 더 큰 거울 앞에 앉아 뉴스를 진행했다. 뉴스는 오늘의 주요 사건 한 두 개와 날씨로 진행되었다. 사실 아이는 아직 세상사를 잘 몰랐기에 오늘의 날씨가 가장 중요한 뉴스였다. 아이는 인형 놀이에도 고수였다. 어쩌다 둘이나 생긴 미미 인형 중 하나의 머리를 과감히 잘라 남자애로 정했다. 월드컵 때 받은 곰 인형과 동생의 공룡 장난감도 모두 제 역할을 정해주었다. 텔레비전에서 본 로맨스와 액션을 새롭게 재탄생시키며 인형극을 즐겼다.


혼자서도 잘 놀았지만, 아이는 할머니 옆에서 재잘조잘 떠드는 걸 가장 좋아했다. 그 작은 아이는 쏟아내고 싶은 이야기가 뭐 그리 많았는지 쉴 새 없이 할머니 옆에서 떠들어댔다. 할머니는 허허 웃으며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러다 방송조정 시간이 끝나고 애국가가 나올 때쯤이면 아이는 떠들기를 멈추고 텔레비전의 볼륨을 높였다. 1절부터 4절까지 동해물부터 무궁화까지 집안을 돌아다니며 완창을 하고 나서야 다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이빨 빼자. 할머니는 반짇고리를 들고 오신다. 튼튼한 하얀 실을 꺼내고 아이를 무릎 위에 누인다. 아이는 할머니의 얼굴을 봤다가 저 멀리 천장을 봤다가 주먹을 꼭 쥐고 눈을 굴린다. 할머니는 아이의 작은 이를 단단히 묶고, 겁먹은 얼굴을 보고 씩 웃다가 순간, 이마를 탁, 친다. 뽁. 힘없이, 아무런 고집 없이 빠져버린 이는 실 끝에서 달랑거린다. 아프진 않다. 이미 거의 빠질 이였다. 아이는 빠져버린 이 사이로 흐흐, 숨을 내쉬어 본다. 할머니는 옥상에 이 던지러 가자며 아이를 내세운다.


옥상에는 할아버지가 한창 하늘색 페인트칠을 하고 계신다. 푸른 가을 하늘을 집에도 담고 싶으신가 보다. 이리저리 구석구석 칠하는 할아버지를 지나, 진득하고 짭짤한 장이 가득 담긴 장독대를 지나, 옥상의 난간에 선다. 까치야, 까치야, 헌 이 줄게, 새 이 다오-. 노래를 부르고는 힘껏 하늘을 향해 이를 던진다.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이 동네에서 아이의 이가 날아가봤자 얼마나 멀리 가겠냐마는, 저 멀리 까치에게 닿게 던져본다.* 할아버지도 아이를 보며 까치를 한 번 불러 주신다. 까치야, 이 빨리 가 온나!

20.jpg *아이의 이는 어디론가 날아가 누군가의 장독대에 얹혔을지도 모른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잠을 깨운다. 주황빛 노을이 아이의 눈을 쓰다듬으며 잠을 깨운다. 아이는 눈을 뜬다. 뉴스를 보고 있는 할머니의 무릎 위에서 잠을 깬다. 코끝에서는 맛있는 수제비 냄새가 나고, 익숙한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황금색 스포티지 엔진소리, 엄마가 오셨다. 아이는 후닥닥 일어나 창밖을 바라본다. 골목에서는 방금 주차를 마친 엄마가 내리고 있다. 아이는 손을 흔든다.




✍일어나는 소리, 흣쨔!


느린 걸음의 산책가이자 수집가.

부러 신경 쓰지 않으면 후루룩 흘러가버리는 일상 속에서, 그는 한 걸음씩 내딛으며 이야기 조각을 수집한다. 조각은 그의 조각이기도 하고 당신의 조각이기도 하다. 때론 그림책 같기도 하고, 한 편의 시 같기도 하다. 잠깐 걸음을 멈춘 그는 우리에게 따뜻한 미소를 띄워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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