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물 <깜깜과 어스름의 사이>
* 2021.04.05에 출간된 독립출판물 <깜깜과 어스름의 사이>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연재합니다.
독립책방 스토리지북앤필름(해방촌, 강남점), 망원 이후북스, 공릉 지구불시착, 인천 북극서점, 원주 책빵소에 입고되어 있습니다.
저는 지금 KTX를 타고 부산으로 가고 있어요. 편지를 쓰는 지금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참 아름다워요. 구름이 퐁퐁 솟아 있는 가을 하늘은 시원한 푸른색이고요, 노오랗게 잘 익은 논이 끝없이 펼쳐져요. 거울처럼 투명하게 비치는 강물에는 초록 나뭇잎이 떠다니네요. 완벽한 가을입니다.
올해 초 설날에만 해도 코로나가 금방 끝날 줄 알았지요. 추석까지 이렇게 벌벌 떨고 있을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최근에는 수도권 확진자가 확 늘어나 부산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많았어요. 제가 아픈 건 상관없대도 엄마 아빠와, 할머니 할아버지께 옮기면 안 되니까요. 더군다나 고3 동생한테도요. 그래도 어찌 되었든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KF94와 손 소독제로 무장했으니까요, 걱정 마세요.
오전에 학교에서 근로를 하던 와중에 카톡을 하나 받았어요.
‘오늘 도착시간에 맞추어
부산역으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아빠. 어딘가로 향하는 여행자를 위해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 걸 생각하니 든든해진달까요. 벌써 부산역에 서 계실 아빠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또 공지를 하나 보내셨죠. ‘즐거움의 바다 속에서 허우적이기’라는 제목으로 된 추석 계획표였어요. 하루에 프로그램 하나씩, 먹거리 하나씩. 오랜만에 내려오는 두 딸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신 걸까요. 일주일간 어떤 재미난 일이 펼쳐질지 기대가 됩니다.
아빠, 그런데 혹시 기억나세요? 저희 삼남매가 모두 작은 아이였을 때 산으로 들로, 어딘가로 많이 데려가 주셨잖아요.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요. 그때는 산에 자주 갔는데, 기억나시나요. 어젯밤 편의점에 진열된 컵라면을 주욱 보다 새우탕이 보이더라고요. 주황색 포장에 하얗고 두꺼운 글씨로 적힌 새우탕. 산에 갈 때면 제가 항상 고르던 컵라면이었는데...
아, 요즘 오마이걸 유아가 부른 ‘숲의 아이’라는 노래도 반복해서 듣고 있는데요, 무대 영상을 보거나 가만히 눈을 감고 들으면 점점 산으로 숲으로 가고 싶어져요.
‘길을 잃으면 키가 큰 나무에게 물어야지 / 그들은 언제나 멋진 답을 알고 있어 / … / 서로 눈을 맞출 때 더 푸르르던 숲 / 가장 높은 절벽에 올라가 소리쳐 / 멀리 세상 저편에 날 기다리는 숲’
어렸을 때 갔던 숲과 산이 그리워져요. 그 푸르르던 숲이.
우리가 자주 가던 숲은 어린이 대공원의 백양산이나, 집 앞 황령산, 혹은 케이블카가 있는 금정산이었지요. 산에 갈 때면 늘 차를 타고 가던 기억이 나요. 금색 스포티지에 폴짝 올라타 앉으면 부릉부릉 벌써 신났어요.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금방 잠이 들곤 했지만요. 30분 이하의 짧은 이동 거리였을 텐데, 저는 차만 타면 왜 그렇게 졸리는지요.
도착했다-, 일어나라-, 는 소리에 저는 눈을 비비적대며 잠에서 깨요. 뒷좌석 문을 열고 폴짝 뛰어내리면, 은호가 뒤에서 폴짝 따라 내려요. 언니는 앞 좌석에서 폴짝 뛰어내리고요. 언니는 우리 중에 제일 크니까 조수석에 앉고, 저와 은호는 엄마를 끼고 뒷자리에 앉았었죠. 지금은 은호가 제일 덩치가 커서 자리가 바뀌었지만요. 뒷자리는 엄마 옆이어서 좋지만 뭔가 ‘조수’의 역할이 탐나서 앞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는 했어요. 결국 은호가 크기 전까지 조수석을 제법 꿰차기도 했죠.
등산을 시작하기 전에는 항상 편의점에 들렀어요. 산이 있는 곳 건너편 편의점에서 우리는 항상 컵라면을 샀지요. 저는 오직 새우탕으로 직진해 쥐어 들고는 열심히 새로운 걸 고르는 언니 주변을 서성댔고, 아빠는 왕뚜껑을 골라 든 채 언니를 기다렸죠. 저도 아빠도 참 확고한 취향이었어요, 그쵸.
우리가 어려서 그런지 등산은 그리 힘들지 않았어요. 아빠가 부러 힘들지 않은 길로 가셨던 거겠죠. 혹은 가야 할 길을 잘 이끌어 주셔서인지도 모르겠어요. 먼저 디딘 아빠의 발걸음 하나하나를 따라 디디며 산의 길을 알아갔어요. 먼저 가는 그 뒷모습이 떠오르네요. 가방을 멘 든든한 뒷모습.
걷는 길은 항상 볼 게 많았어요.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는 다람쥐와 청설모, 엄마가 여길 봐! 하며 보여주는 작은 들꽃과 산딸기. 그땐 분명 우와! 하고 잠깐 보고는 다시 곧장 걸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작고 소중한 걸 놓치지 않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게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요즘은 자꾸만 그 소중한 것 앞에 한참 멈춰 서요. 가만히 바라보다 사진을 찍기도 해요. 자연이 왜 이렇게 점점 더 좋아지는 걸까요.
드디어 적당한 산 중턱에 도착하면 아빠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곳을 물색했어요. 그리고 가방에서 큰 돗자리를 꺼내 펼쳤죠. 우리는 우다다 신발을 벗고 앉으며 아빠의 가방 속에서 나오는 물건들을 기다렸어요. 아까 산 컵라면, 집에서 챙겨온 뜨거운 물이 담긴 보온병, 아침에 미리 만들어 놓은 왕김밥, 각종 반찬과 김치, 그리고 과일 통까지. 우리는 들썩대며 컵라면을 깠어요. 움푹한 바닥 부분을 콕 찔러 비닐을 뜯고, 뚜껑을 연 후 안의 스프를 꺼냈죠. 스프 한쪽 끝을 잡고 탈탈 털어낸 후 쭉 찢어 가루를 쏟아냈어요. 그렇게 준비가 끝나면, 아빠는 차례차례 뜨거운 물을 부어 주셨지요. 3분이 지날 동안에는 왕김밥을 입에 욱여넣으면서요.
땡, 3분이 지나면 허겁지겁 호로록 먹기 시작했어요. 은호와 엄마가 하나를 나누어 먹는 동안 언니와 아빠, 저는 하나씩 꿰차고 국물까지 호로록 먹었어요. 중간중간 김치를 먹는 것도 잊지 않고요. 그때 산에서 먹은 라면은 어찌나 맛있던지요. 다 먹고 나면 발라당 누워 부른 배를 문지르면서 과일을 오물오물 먹었어요. 적당히 비치는 햇빛과 바람 속에서 잠깐 가방을 베개 삼아 누워 있다 보면 까무룩 잠이 들기도 했어요.
가끔 우리는 케이블카도 탔어요. 금정산의 케이블카가 내는 끼릭대는 소리를 들으며 숲의 정수리를 보았어요. 몇 번을 타도 또 타도 항상 재밌었던 케이블카가 생각나요. 아, 금정산의 입구에서 팔던 하얀 솜사탕도 기억나요. 손이 찐득거려도 허버허버 먹었던 게 기억나네요. 황령산 주황색 포장마차에서 먹었던 어묵과 물떡도요. 아- 참 맛있는 게 많았는데. 분명 먹으러 산에 간 건 아니었지만 제 기억엔 맛있는 것들이 그득이네요.
그립네요. 이젠 모두가 바빠졌잖아요. 아, 물론 저희가요. 회사에 다니느라 혹은 학교에 다니느라 아니면 고3이라서.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 우리는 점점 다 같이 모이는 시간이 줄고 있어요. 추석이 되어서야 드디어 다섯이 완전체로 모였네요. 아빠, 아빠는 퇴직하신 후에 어떤 나날을 보내고 계신가요. 일상이 궁금해요. 매번 물어봐도 대답 없이 나도 바쁘다-며 이야기를 해주시지 않잖아요. 하하, 궁금해요, 아빠의 일상이.
창밖으로 보이는 산을 배경으로 아빠와 산을 오르던 나날을 떠올립니다. 컵라면을 사 들고 산으로, 숲으로 가고 싶어지네요.
아빠를 만나러 갈게요.
✍일어나는 소리, 흣쨔!
느린 걸음의 산책가이자 수집가.
부러 신경 쓰지 않으면 후루룩 흘러가버리는 일상 속에서, 그는 한 걸음씩 내딛으며 이야기 조각을 수집한다. 조각은 그의 조각이기도 하고 당신의 조각이기도 하다. 때론 그림책 같기도 하고, 한 편의 시 같기도 하다. 잠깐 걸음을 멈춘 그는 우리에게 따뜻한 미소를 띄워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