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물 <깜깜과 어스름의 사이>
* 2021.04.05에 출간된 독립출판물 <깜깜과 어스름의 사이>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연재합니다.
독립책방 스토리지북앤필름(해방촌, 강남점), 망원 이후북스, 공릉 지구불시착, 인천 북극서점, 원주 책빵소에 입고되어 있습니다.
집을 빼달란다. 계획에 없던 이사를 계획해야 한다. 분명 몇 달 전 집주인이 바뀔 때만 하더라도 ‘전세금 올리는 것 없이 계속 쭉 사셔도 돼요’ 라더니. 역시 사람 마음이란 갈대 같은 건가. 내년 1월까지 집을 비워달라, 그것이 집주인의 통보였다. 나는 짐을 싸서 나가야 한다. 집주인의 말에 세입자는 그저 보따리를 싸야 한다.
갑자기 닥친 집과의 이별에 마음이 헛헛해진다. 여기에 산 지도 벌써 4년이 다 되어가네. 그 4년의 시간 동안 추억이 제법 쌓였다. 어느새 정이 너무도 많이 들어버려서, 이 집을, 이 동네를 떠나기가 너무 싫다.
2017년 1월 13일, 추운 겨울이었다. 짐을 낑낑댄 채 아무도 살고 있지 않던 집의 문을 열었다. 언니는 전에 살던 자취방에 좀 더 있다가 나중에 들어오기로 했고, 그동안 이 집은 나의 차지였다. 하지만 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냉장고도 없었다. 언니가 이사 올 때 가져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한 달 뒤였다. 그때까지 냉장고 없이 살아야 했다. 다행히 할 줄 아는 요리도 없었고, 하고 싶은 요리도 없는 데다가 학교 연극 동아리에 참여하느라 집에 있는 시간이 적었다. 음식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나마 비상식량이라고 산 음식은 택배 박스에 차곡차곡 넣어 발코니에 내보냈다. 추운 겨울 날씨는 차가운 입김으로 냉장고 없이 겨울을 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가끔 창문을 열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박스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귤을 하나씩 빼먹으며 집의 첫 계절을 맞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방에는 물건이 쌓여갔다. 매트리스, 책상, 옷장, 서랍 등 물건이 자꾸만 늘어간다. 벽에는 기억하고 싶은 문구나 눈을 뜨면 보고 싶은 그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진을 하나둘 붙였다. 작은 조개나 말린 꽃잎, 미니 산타 피규어와 스노우볼, 스투키 등 물건들은 한 자리씩 자기 자리를 차지했다. 나의 방은 점점 더 나답게 변해갔다.
차가운 바람 사이로 따뜻한 햇살이 비집고 들어온다. 어느새 옆방에는 언니가 이사 왔고, 봄이 왔다. 봄에는 미나리가 먹고 싶어진다. 어느 봄날 아부지와 청도 미나리를 질리도록 먹고 난 후부터다. 기다란 미나리를 아랫부분부터 뚝뚝 접어 이파리를 돌돌 말아 쌈장에 콕 찍어 먹으면 그렇게 상콤할 수가 없다. 그리고 어느 날 요리에 욕심이 생긴 나는 봄의 나물에 대해 찾아보게 된다. 달래를 발견하고는 달래 된장국에 도전한다. 쌉싸름하면서도 향긋하게 퍼지는 봄의 맛은 옆집의 벚꽃과 함께 활짝 피어난다.
항상 학교 주변만 생각하고 살아서 그런가, 한강이 그렇게 가까운 줄 몰랐다. 집 주변에 무엇이 있나 지도로 살펴보다 한강 가는 길을 찾았다. 신호등을 건너 아파트 사이 골목을 지나, 뱅글뱅글 돌아가는 내리막길을 걸어가 노란색 터널을 통과하면 한강이 나온다. 너무나도 가까웠던 한강. 3년을 살고 나서야 동네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서울의 야경은 끝내준다-고 누군가 내게 말했었다. 하지만 나는 서울에 사는 내내 공감할 수 없었다. 그저 외롭고 힘들고 지치기만 하는, 복잡한 도시라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한강의 밤을 한 걸음씩 천천히 마주하니 왜 그들이 서울의 야경을 아름답다고 말했는지 알게 되었다. 일렁이는 물 위에 그려지는 기차의 불빛과 꺼지지 않는 빌딩의 불빛이 나를 가만히 토닥여 준다. 외로워도, 힘들어도 괜찮다고.
한강을 따라 성큼성큼 뛴다. 얼마 뛰지 못하고 금방 숨이 차서 걷게 된다. 아직 열기가 식지 않은 공기는 습기를 머금어 나의 땀을 쭉쭉 뺀다. 따릉이를 타고 풀숲과 다리 위를 달리면, 습한 여름 공기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식혀준다.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나무에선 진한 풀냄새가 난다. 그리고 나는 그 냄새를 맡으며 자두를 떠올린다. 냉장고에 넣어 둔 시원하고 달콤한 자두를 떠올리며 페달을 밟는다.
푸르디푸른 가을 하늘은, 너무나도 맑고, 나의 필름 카메라를 꺼내게 하고, 기꺼이 이불을 옥상으로 가져가 말리게 만든다. 이불이 마를 때까지 적당한 온도의 바람과 햇살 속에서 나는 낮잠을 잔다.
친구가 밤을 선물해주었다. 언젠가 집에 밤이 너무 많다-, 갖고 싶으면 말해라-고 하길래 ‘나 밤 줘,’ 한마디 했더니 이렇게나 많이 줬다. 검은 비닐봉지를 꽉 채운 밤을 영차영차 집으로 데려오며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떠올린다. 주인공 이치코는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운 겨울을 대비하여 밤 조림을 만든다. 가을에 만들어두었다가 맛이 배면 겨울에 하나씩 꺼내 먹는. 아, 나도 밤 조림을 만들어야지, 겨울을 준비해야지. 바닥에 앉아 밤을 하나씩 깐다. 처음 만들어 보던 나는 어떤 요령도 없어 손이 아려오도록 밤을 깠다. 그리고 통에 담긴 달콤한 밤은 겨울을 기다리게 한다. 얼른 달콤해져라.
며칠 전, 뜬금없이 호박이 내 손에 들어왔다. 엄마께서 주문해주신 반찬 사이에 사은품이라며 끼어 있던 재료였다. 무얼 하지 곰곰이 생각하다 문득 언니와 나는 호박전을 떠올렸다. 노릇노릇 구운 노오란 호박전.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 우리는 또 새로운 요리에 도전해본다. 뭔가 2% 아니 10% 부족한 호박전을 막걸리와 함께 오물거리며 가을의 새로운 추억을 쌓는다.
친구가 집에 놀러 왔다. 밤 조림을 맛보고 싶다며 얼른 달라 한다. 내가 이미 야곰야곰 꺼내 먹은 터라 얼마 남지 않았다. 남은 밤을 마저 다 꺼내 그릇에 담는다. 작은 포크와 함께 친구에게 건넨다. 그가 맛을 느낄 때까지 표정을 관찰한다. 오물오물. 맛있다! 친구는 여러 번 되뇌며 이거 더 없냐며, 다음 겨울에도 또 만들어 달라 말한다. 밤 조림은 성공적이었다.
이사 후 처음 마주한 겨울은 그저 이불뿐이었지만 곧 언니를 따라 난방 텐트를 구입했다. 방 안에 텐트를 치고, 그 안에 이불을 깔고, 그리고 그 옆에는 나의 스탠드까지. 벽을 통해 들어오는 외풍도 막고, 동굴 속 곰이 된 듯한 기분도 느끼고. 참 아늑한 겨울이다. 해가 일찍 지는 겨울밤, 뜨끈한 전기장판과 스탠드 불빛, 그리고 동굴 속에서 책을 읽노라면, 비밀스러운 여행자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4년 동안 이 집에서 참 많은 추억이 쌓였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집도, 나도 많은 것이 바뀌었다. 옆집에는 이제 벚나무가 없고, 내 방에는 책장도 생겼으며, 집 구석구석 하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독립출판물도 냈고, 그림책 학교도 다녔고, 이제 다시 학교에 복학했다. 시간이 흐른다. 계절은 쌓이고 기억은 한 겹 한 겹 두꺼워진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어느새 늘어난 짐을 정리해본다. 떠나기 싫어도, 떠나야 하니까. 책장 속 책을 하나씩 빼내며 이별을 준비한다. 그러고 보니 이번 가을과 겨울은 이 집에서 보낼 마지막 계절이다. 이번 가을 겨울은 더욱더 애정 담긴 시간으로 보내야겠다.
✍일어나는 소리, 흣쨔!
느린 걸음의 산책가이자 수집가.
부러 신경 쓰지 않으면 후루룩 흘러가버리는 일상 속에서, 그는 한 걸음씩 내딛으며 이야기 조각을 수집한다. 조각은 그의 조각이기도 하고 당신의 조각이기도 하다. 때론 그림책 같기도 하고, 한 편의 시 같기도 하다. 잠깐 걸음을 멈춘 그는 우리에게 따뜻한 미소를 띄워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