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물 <깜깜과 어스름의 사이>
* 2021.04.05에 출간된 독립출판물 <깜깜과 어스름의 사이>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연재합니다.
독립책방 스토리지북앤필름(해방촌, 강남점), 망원 이후북스, 공릉 지구불시착, 인천 북극서점, 원주 책빵소에 입고되어 있습니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머리를 바짝 올려 묶은 그 아이는 학교까지 5분 거리에 살았다. 집에서 나와 골목을 죽 올라가, 세탁소 앞에서 왼쪽으로 돌아, 으스스한 귀신의 집을 후다닥 지나, 길을 건너, 송미 문구를 지나, 아직 열지 않은 이모 분식까지 지나면, 학교가 나왔다. 아이는 매일 그 길로 학교에 갔다.
아이는 용돈을 받았다. 매주 1000원씩. 학교를 마치고 나와 이모 분식에서 떡볶이 두 컵이나 피카츄 하나와 어묵 하나를 사 먹을 수 있는 가격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간식을 잘 먹지 않았다. 아이의 관심은 오로지, 송미 문구였다. 아이는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오늘의 업데이트를 확인했다. 뽑기 판이 얼마나 줄었는지, 친구들이 몰려서 구경하는 건 대체 무엇인지, 새로운 장난감은 무엇이 들어왔는지,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물건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도대체 ‘얼마’인지. 학교 준비물을 사러 갈 때도, 혹은 나는 살 것이 없는데도 친구가 무얼 사야 한다면 그때도, 문방구에 들락날락하며 동태를 파악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샀다.
색색깔의 고무찰흙, 비밀 일기장, 귀여운 구슬, 동그란 딱지, 기분을 알려주는 반지, 좋아하는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온도계, 물에 넣으면 공룡으로 변하는 개구리알 …
물론 꾹 참고 사지 않은 것도 많았다. 어른인 척하는 친구가 먹는 레쓰비, 딱딱 소리를 내는 총알 탄, 매번 좋은 게 나온 걸 본 적이 없는 뽑기 판, 물에 넣으면 커지는 손수건, 어쩐지 기분 좋아지는 본드 풍선, …
하지만 어느 날부터 아이는 돈을 쓰지 않기 시작했다. 더 이상 기웃거리지 않기 시작했다. 그 물건 때문이었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가지기 시작한, 쉬는 시간에 와글와글 모여서 노는, 그 물건. 다마고치.
손바닥만 한 동그란 알 모양의 기계에, 흑백의 작고 네모난 화면에서는 이상한 생명체가 꿈틀거렸다. 모두 비슷하게 생겼지만 아이들은 각자 이름을 붙였으며 성별을 가지고 있었고, 서로 통신을 통해 아이를 낳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작은 버튼을 뾱뾱 눌러 더러워서 죽기 전에 똥을 치워주고, 배고파서 죽기 전에 밥을 주는 일이었다.
아이는 그 기계가 갖고 싶었다. 문방구에 가서 곁눈질로 슬쩍 보니, 한쪽 벽에 색색의 다마고치가 줄지어 달려 있었고, 5000이라는 숫자가 보였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하나둘 접어보니 문구 탐방을 제법 참아야 할 것 같았다. 5번의 용돈, 5주의 시간… 잠깐 고민하다 주먹을 꽉 쥐며 결심했다. 5000원, 까짓 꺼, 모을 수 있다.
문방구를 쳐다보지 않고 등하교한 지 몇 주가 흐르고, 아이는 당당한 표정으로 지갑에 손을 뻗었다. 고양이가 달린 푸른색 지갑 속에서, 드디어, 천 원짜리 다섯 장이 나왔다. 아이는 외쳤다. 그래, 지금이다! 점 찍어 둔 그 다마고치를 차지할 순간이 왔다! 아이는 옆방으로 달려가 누워 계신 할아버지를 쿡쿡 찔렀다. 큰돈은 혼자 쓰러 가기 겁나는 법. 할아버지를 끌고 그곳으로 향했다. 송-미-문-구!
풀쩍풀쩍 세탁소를 지나 귀신의 집을 지나 길을 건너 송미 문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라. 예상과 달리 다마고치가 없다. 아니, 진짜 없다. 아무리 봐도 없다. 당황한 눈으로 이리저리 살피고 있으니 뽀글 머리 송미 문구 아주머니께서 아이를 쳐다보신다. 그리고 아이는 눈으로 메시지를 읽는다. 다-마-고-치-다-팔-렸-어-
아이는 눈을 부릅뜨고 방향을 틀어 밖으로 나간다. 할아버지를 끌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긴다. 송미 문구? 없대도 상관없다. 다음 후보가 있다. 왕!자!문!구! 열 걸음만 옮기면 또 문방구가 있었다. 그곳으로 가자!
딸랑- 유리문을 열자마자 아이는 눈을 굴린다. 오른쪽 벽에 무언가가 반짝인다. 다마고치다! 외로이 달려 있는 분홍색 다마고치 하나. 색이 내키진 않지만 아이는 결심한다. 이걸 사기로!
그리고 아이는 열심히 생명체를 키웠다. 쉬는 시간마다 똥을 치우고 밥을 먹이고, 친구들과 통신을 하고. 수업 종이 치면 무음모드로 바꾼 후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가, 간간이 연필을 떨어뜨려 줍는 척하며 서랍 속 생명체의 건강을 살폈다. 두 달이 채 지나지도 않아 질려버려 장롱 속에 처박힐 다마고치의 운명은 모른 채…
덧. 다음 주, 새 용돈을 받은 아이는 다마고치를 산 기념으로 친구들과 피카츄와 떡볶이를 사 먹었다. 텅텅 빈 지갑은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
✍일어나는 소리, 흣쨔!
느린 걸음의 산책가이자 수집가.
부러 신경 쓰지 않으면 후루룩 흘러가버리는 일상 속에서, 그는 한 걸음씩 내딛으며 이야기 조각을 수집한다. 조각은 그의 조각이기도 하고 당신의 조각이기도 하다. 때론 그림책 같기도 하고, 한 편의 시 같기도 하다. 잠깐 걸음을 멈춘 그는 우리에게 따뜻한 미소를 띄워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