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물 <깜깜과 어스름의 사이>
* 2021.04.05에 출간된 독립출판물 <깜깜과 어스름의 사이>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연재합니다.
독립책방 스토리지북앤필름(해방촌, 강남점), 망원 이후북스, 공릉 지구불시착, 인천 북극서점, 원주 책빵소에 입고되어 있습니다.
몸을 일으켜 창을 연다. 파랗고 투명한 바람이 흘러 들어온다. 푹 잤더니 어느새 해가 중천이구나. 코로 훅 들어오는 찬 공기가 잠을 확 몰아낸다. 눈을 깜-빡-이며 해야 할 일을 떠올린다. 오늘은 집 청소를 하기로 마음먹었지. 자자, 몸을 움직이자.
이불을 돌돌 말아 세탁기로 가져간다. 여름 이불이 이젠 꽤나 춥다. 이불 두께 차이 뭐 별거 있겠어-하고 미루고 미루다 결국 간밤에 한기를 느끼고서야 몸을 움직인다. 올 여름 가을을 함께 보낸 이불에게 고마워, 인사를 속삭이고는 세탁기 전원을 누른다. 이불 세탁, 56분, 시작.
다음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정리하자. 무려 3주라는, 이례적으로 긴 시험 기간 동안 옷 정리조차도 하지 못한 채 살았더랬다. 물론 착착 개 놓는 습관은 무너지지 않아, 착착 개어진 옷들이 옷장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대문만 서성이며 쌓여 있다. 어디 보자, 추워져 더 이상 입지 못하는 여름옷은 왼쪽으로, 겨울옷은 오른쪽으로. 겨울옷은 제자리를 찾아 넣어주고, 여름옷은 빨아서 진공 팩에 넣어 정리해야지. 읏차-
옷을 치우니 드디어 바닥이 고개를 내민다. 이리저리 빠진 머리카락들이 함께 모여 수다를 떨고 있다. 먼지들도 드문드문 끼어 있다. 아니, 3주 청소 못 했다고 이렇게 더럽기야? 생각보다 지저분한 나의 방이 괜히 부끄럽다. 불현듯 어제의 대화가 떠오른다.
“요즘의 고민은 무엇인가요?”
수빈은 내게 물었다. 심리학과 대학원생인 그는 심리 검사 해석에 대한 실습을 하고 있다. 대상은 나. 조심스럽게 제안하던 부탁에 나는 그의 심리 검사 대상이 되기로 했다. 검사지는 저번에 작성했고, 오늘은 심리 검사 해석 전 나의 정보를 얻기 위해 인터뷰 중이다.
“글쎄, 요즘의 고민은, …”으로 시작한 답은 뱉어 놓을수록 점점 길어졌다. 요즘 따라 참 고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경쟁하려는 마음이 큰 것 같아. 학교 수업을 들으면서 친구들보다 내가 뒤처지면 안 되는데, 내가 더 모르면 안 되는데, 이런 조급한 마음이 들어서 자꾸만 숨이 차. 불안해. 게다가… 이건 참 부끄럽지만, 속으로 은근히 누군가를 무시하고는 해... 나는 쟤보다 이거 더 잘 아는데, 쟤는 모르겠지... 나는 이런 부분 잘하는데, 쟤는 너무 모른다... 이렇게 말이야. 근데 이러다가 실은… 그게 아니었던 적이 많아. 하하, 부끄럽다.”
“정신적 질병 진단 및 치료 경험이 있나요?”
멍하니 있을 때마다,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곱씹었던, 나의 19살 이후의 삶. 그것을 말할 차례가 왔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 상담 선생님 이후에는 또 처음인 것 같다. 물론 그도 미래의 상담 선생님이 될 터이지만 그 이전에 나의 친구이기도 했다.
“첫 우울증 진단은 스무 살 때였어. 음…근데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때부터였는지도 몰라. 중학교 때까지의 나는 제법-항상- 인정받고, 눈에 띄는 아이였는데, 날고 기는 아이들이 모인 그 고등학교에서 나는 유령이나 마찬가지였거든. 수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했고, 싫었고, 부끄러웠고, 무시당하는 게 화가 났고, 편애하는 선생님들이 미웠어. 그때 매일 밤 이불 속에 숨어 울었는데….
대학도 열아홉이라는 어린 나이에 왔더니 참 미숙했던 것 같아. 관계를 맺는 법도, 어른이 되는 법도 몰랐거든. 너무 낯설고 어렵고 외로웠어. 그래서 스무 살에 펑 하고 터져서 우울증이 오지 않았나 싶어. 그때도 참 많이 울었는데... 나, 죽고 싶어서.. 매듭 묶는 방법도 찾아보고.., 이곳저곳 자해도 하고, …마포대교에 가보기도 했어. 하하, 지금은 괜찮지만…”
그와의 대화는 참 부끄러웠다. 나의 바닥을 모두 보여준 것 같아 부끄러웠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더럽고 먼지 가득한 나의 방을 보여준 것 같아 민망했다.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고, 먼지도 가득하며, 엉망진창인 내 방. 혹여 나의 발가벗은 모습을 보고 그가 실망하진 않았을까, 놀라진 않았을까. 정말, 혹시 정말 그래서 나를 떠나가진 않을까. 생각들이 먼지처럼 퐁퐁 올라온다.
위잉-
청소기를 민다. 구석구석 먼지를 빨아들인다. 부끄러운 마음도 함께 빨아들인다. 태연한 표정으로 구석구석 청소기를 민다. 그래, 나의 저 밑바닥까지 보여준 것은 참 민망하지만, 뭐 어쩌겠어. 그게 나인걸. 그냥 이런 나인걸.
삐-삐-삐-
빨래도 어느새 다 됐나 보다. 그리고 이런 내가 싫지는 않다.
✍일어나는 소리, 흣쨔!
느린 걸음의 산책가이자 수집가.
부러 신경 쓰지 않으면 후루룩 흘러가버리는 일상 속에서, 그는 한 걸음씩 내딛으며 이야기 조각을 수집한다. 조각은 그의 조각이기도 하고 당신의 조각이기도 하다. 때론 그림책 같기도 하고, 한 편의 시 같기도 하다. 잠깐 걸음을 멈춘 그는 우리에게 따뜻한 미소를 띄워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