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물 <깜깜과 어스름의 사이>
* 2021.04.05에 출간된 독립출판물 <깜깜과 어스름의 사이>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연재합니다.
독립책방 스토리지북앤필름(해방촌, 강남점), 망원 이후북스, 공릉 지구불시착, 인천 북극서점, 원주 책빵소에 입고되어 있습니다.
주황색 불빛이 흘러 지나간다. 나의 손이 보였다 보이지 않았다-, 나의 발이 보였다 보이지 않았다-. 손을 이리저리 꼼지락꼼지락 움직여보며 깜빡이는 빛을 만져본다. 눈을 깜빡이며 저 멀리 터널을 바라본다. 어둠 속에서 얼마 전에 본 영화 <조제, 그리고 호랑이와 물고기들>이 떠오른다. 다리가 아파 바깥세상을 보지 못했던 조제, 츠네오를 만나 사랑을 시작하는 조제, 그를 통해 생애 처음으로 터널을 만나 신기해하던 조제가, 떠오른다. 그리고 떠오르는 것 또 하나, ‘그’의 얼굴. 휘어진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의 얼굴, 옅은 미소가 행복으로 번지던 그의 얼굴.
우리의 연애는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감자 같은 연애다. 서로의 마음이 불확실해 불안해하다, 결국 마음이 같았다는 걸 확인하고는 연애를 시작하게 됐다. 갓 시작한 연애는 꽉 쥐고 있어도 더 꽉 쥐고 싶고, 보고 있어도 더 보고 싶다.
사실 나는 너를 잘 몰랐다. 제법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널 몰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너와 함께 있을수록, 너를 알게 될수록 네가 더 좋아진다. 따뜻하고 좋은 사람, 사랑 주는 법을 아는 사람, 나와 참 많이 닮은 사람, 나와 참 많이 다른 사람.
나는, 나를 바라봐 주는 그 눈이 좋다. 조심스럽게 나를 걱정하는 그 손길이 좋다. 살며시 그리고 꽉 잡은 그 손이 좋다.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가 좋다. 수줍게 그리고 능글맞게 말하는, 낯간지러운 그 말이 나는 좋다. 나를 꽉 안아주는 그 품이 좋다. 내가 생각났다며 챙겨주는 그 마음이 참 좋다.
너를 바라보고 있으면 주위 배경은 점점 흐려진다. 여기가 어딘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상관없이 나는 너의 눈만 보인다. 그 맑고 투명한 갈색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너만 보인다. 우리의 시간은 느리지만 빠르게 지나간다. 너와 함께 있으면 하루가 너무나도 짧다.
하지만 이만큼 널 좋아할수록, 점점 더 너를 사랑할수록 한편에 불안과 슬픔이 있음을 깨닫는다. 서로를 바라보기에도 시간이 모자란 우리가, 언젠가는 익숙해지고 소홀해질 수도 있겠지, 바쁜 일상에 서로에게 지금만큼의 노력을 쏟지 못할 수도 있겠지, 언젠가 이런 설렘이 시들해질 수도 있겠지.
"언젠가 당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 거야." 베르나르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 우린 또다시 고독해지고, 모든 게 다 그래. 그냥 흘러간 1년의 세월이 있을 뿐이지."
<조제, 그리고 호랑이와 물고기들>
조제가 즐겨 읽던 프랑수아즈 사강 소설에서,
나의 따끈따끈한 연애 소식에 설레하고 부러워하던, 3년의 연애를 이어가는 중인 친구가 자신의 연애 초반을 떠올리다 말했다.
“그 시기에만 할 수 있는 사랑이 있는 것 같아.”
연애 초반 설렘 가득했던 사랑이 있었고, 익숙하고 편해진 지금의 사랑도 있고. 시기마다 다른 사랑의 모습에 나는 잠깐 부러울 뿐이라고.
그래, 맞아. 우리가 지금이기에, 지금 이 순간이기에 할 수 있는 사랑의 모습이 있겠지, 설렘 가득한 지금의 순간이 있고, 앞으로 또 다른 사랑의 모습이 있겠지. 그렇기에 지금이 참 소중하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만날 다양한 사랑의 모습이 기대된다. 그래서 나는 지금 너에게 말하고 싶다. 널 좋아한다고, 많이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영화의 끝 언저리에서 조제는 이렇게 말한다. 츠네오를 만나기 전까지 자신은 어두컴컴하고 깊은 바닷속에서 혼자 살았다고. 이에 츠네오는 조제에게 외롭지 않았냐고, 묻는다.
“딱히 외롭지는 않아.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단지, 천천히, 천천히 시간이 흐를 뿐이야.
…난 다시 그 장소로는 돌아갈 수 없을 거야. 언젠가 네가 떠나고 나면, 길 잃은 조개처럼 혼자서 바다 밑을 데굴데굴, 데굴데굴, 굴러다니게 되겠지.
그렇다고 해도, 그것 역시 좋아.”
지난 연애 끝에서 눈이 불어 터지도록 울었던 내가 떠오른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미어지고 찢어진다는 게 무엇인지 알게 했던 그 아픔이 떠오른다. 우리 언젠가 그 끝을 마주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 아니 마주한다 해도 지금 네가 너무 소중해.
철썩철썩. 버스에서 내려 푸르고 광활한 바다를 바라본다. 파도 위에서 너를 떠올리고, 흘러 들어오는 너를 향해 쏟아내고 싶은 말을, 한마디씩 보낸다. 이미 내 삶 깊은 곳까지 헤엄쳐 온 너에게, 그리고 더 깊게 헤엄쳐갈 너에게, 노을에 반짝이는 이 금빛 물결 위로 한마디씩, 띄워 보낸다. 좋아한다고, 소중하다고, 고맙다고. 지금 나는 너를 참 많이 좋아한다고, 더 많이 많이 말하고 더 더 사랑하고 싶다고. 설레는 사랑 노래를 질리도록 부르며 나의 마음을 말하고 싶다고.
그리고 어쩌면, 이 사랑이 영원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일어나는 소리, 흣쨔!
느린 걸음의 산책가이자 수집가.
부러 신경 쓰지 않으면 후루룩 흘러가버리는 일상 속에서, 그는 한 걸음씩 내딛으며 이야기 조각을 수집한다. 조각은 그의 조각이기도 하고 당신의 조각이기도 하다. 때론 그림책 같기도 하고, 한 편의 시 같기도 하다. 잠깐 걸음을 멈춘 그는 우리에게 따뜻한 미소를 띄워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