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물 <깜깜과 어스름의 사이>
* 2021.04.05에 출간된 독립출판물 <깜깜과 어스름의 사이>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연재합니다.
독립책방 스토리지북앤필름(해방촌, 강남점), 망원 이후북스, 공릉 지구불시착, 인천 북극서점, 원주 책빵소에 입고되어 있습니다.
몸의 물기를 닦아낸다. 고개를 숙여 머리를 탈탈 털고, 수건으로 감싼 후 고개를 들어 올린다. 옷을 하나하나 주워 입고, 문고리를 돌려 습기 찬 화장실에서 나온다. 웅얼웅얼, 부엌에서는 대화 소리가 들린다. 슬쩍 다가가 보니 엄마와 아빠가 서울 올라가는 딸래미를 위해 반찬을 싸주고 계신다.
“이제 알겠네. 부모의 마음이 뭔지, 자꾸만 알겠네. 많이 주지 말라고 해도 뭐라도 더 챙겨주고 싶네.”
부시럭 부시럭, 무뚝뚝한 아빠의 말에서 사랑이 뚝뚝 흘러나온다. 하나씩 쌓인 반찬이 어느새 한 보따리다.
오랜만에 부산에 내려온 딸은 금방 다시 서울로 올라간단다. 공부하러 간다는데, 말릴 수야 있겠는가. 괜히 집에 내려오라 해서 딸의 공부를 방해한 건 아닌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딸을 배웅해주기 위해 부모는 부산스럽다. 올라가서 제대로 못 챙겨 먹을까 봐 뭐라도 더, 더 챙겨 주고 싶다. 내려와서 먹고 싶었던 음식은 없는지, 사고 싶었던 것은 없는지 자꾸만 묻는다.
어느새 딸의 비행 시간이 임박했다. 출국장 앞까지 딸을 따라간다. 불투명한 유리문이 닫히고 딸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바라본다. 그들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그득하다. 휘저어 보는 그 손에서 아쉬움이 그득하다.
딸은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며 언젠가 엄마가 한 말이 생각난다.
“너희가 하나둘 떠날 때마다 마음이 참 허전해져. 처음에 언니가 혼자 서울로 올라갈 때 엄만 사실 펑펑 울었어. 그러고 몇 년 뒤에 네가 또 서울로 갈 줄이야. 그래도 그때는 안 울었다. 복닥복닥한 집이 자꾸만 허전해지네.”
딸은 엄마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엄마, 목도리 참 잘 어울린다요.”
처음 보는 목도리가 엄마와 참 잘 어울려, 딸은 칭찬해주고 싶었다. 아름다운 엄마의 모습을 엄마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목도리 예쁘지, 줄까?”
라고 말한다. 딸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며 성급히 손을 휘저어봐도, 엄마는 이미 딸에게 목도리를 둘러주고 있었다.
“아빠표 김치찌개가 너무 먹고 싶었어요.”
집에 내려왔을 때 뭐라도 더, 많이 먹이고 싶은 마음에 계속해서 물었더니 딸이 외친다. 아빠의 김치찌개가 먹고 싶었다고. 다음날 아빠는 분주히 움직인다. 딸을 위해 맛있고 얼큰한 김치찌개를 해주기 위해. 재료를 사고, 진하게 잘 익은 묵은김치를 꺼내고, 앞다릿살을 지글지글 굽는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찬 바람이 추워도, 음식이 오래 걸려도 아빠는 딸이 먹고 싶은 걸 해주고 싶다.
하루는 약속이 있었다. 기분 좋게 술 한잔 마시고 돌아온 아빠의 손에는, 아이스크림 케이크 하나가 쥐어져 있다. 인사를 하기 위해 현관문으로 와다다 달려오는 세 남매의 얼굴을 하나씩 들여다보며 아빠는 싱글벙글이다.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러 케이크를 고르고, 계산을 하고 집으로 오는 동안 아빠는 우리 딸 아들이 좋아하겠지, 맛있게 먹겠지, 하셨겠지.
깊은 밤, 딸은 곤히 잠이 들었다가 익숙하고도 낯선 손길에 잠이 깼다. 아빠의 손이다. 아빠는 말없이 스윽 자고 있는 딸의 얼굴을 쓰다듬고는 딸이 더 깊은 잠을 자도록, 곤히 자도록 조용히 방을 나선다. 딸은 아빠의 따뜻한 손길에 다시 미소를 머금은 채 잠이 든다. 아빠는 딸을 쓰다듬으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띵-비행기가 이륙합니다.
딸은 아직 딸이라, 부모의 마음을 모른다. 무엇이든 더 주고 싶고, 더 떼어주고,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 내 것은 없어도 딸의 것은 챙겨주고 싶은 마음. 딸은 아빠와 엄마의 마음을 잘 모르지만, 기억하고 싶다. 소중히 기억하고 싶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딸이 엄마가 되었을 때, 부모가 되었을 때, 그리고 그 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랑받았던 지금의 이 모습들을 떠올리고 싶다.
✍일어나는 소리, 흣쨔!
느린 걸음의 산책가이자 수집가.
부러 신경 쓰지 않으면 후루룩 흘러가버리는 일상 속에서, 그는 한 걸음씩 내딛으며 이야기 조각을 수집한다. 조각은 그의 조각이기도 하고 당신의 조각이기도 하다. 때론 그림책 같기도 하고, 한 편의 시 같기도 하다. 잠깐 걸음을 멈춘 그는 우리에게 따뜻한 미소를 띄워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