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편지 07
산들.
물집은 좀 괜찮아졌니? 길을 걷기 시작해서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을 겪고 있구나. 부드러운 네 발에 물집이 생기고, 또 굳은살이 박이면 고통에도 좀 익숙해지겠지. 아마도 거친 삶에 너를 맡기는 것이리라.
이곳은 지금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이야. 그래서 매일 영화의 전당에 가고 있어. 오늘은 터키 영화 ‘무스탕: 릴리의 여름’이라는 영화를 보았단다. 터키 여성의 삶을 다룬 영화라서 너와 함께 이 영화를 본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무스탕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를 가리키는 말이야. 우리 모두 처음에는 무스탕과 같은 야생마의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을 거야. 그런데 자신의 기질을 지켜갈 수도 있고, 또 자신의 기질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 때로는 사회 문화적인 관습이 개인이 가진 기질을 억압하기도 하고. 영화는 한 시골 마을에 사는 다섯 자매의 삶을 통해 터키 사회에 남아 있는 가부장적 억압과 중매결혼제도 등을 통해 여성들이 얼마나 억압적인 환경에 놓여 있는가를, 그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고 있어.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다섯 자매는 할머니와 삼촌의 보호 아래 살고 있어. 청소년기의 다섯 자매는 할머니 밑에서 자유분방하게 자랐는데, 삼촌은 늘 그걸 못마땅하게 생각해. 그러던 어느 하굣길에 남학생들과 어울려 바닷가에서 자유롭게 논 것이 구설수에 올라 다섯 자매는 거의 감금당하다시피 살아야 했고, 할머니와 삼촌의 강요로 중매결혼을 해야 하는 처지에 이른단다. 결국 첫째와 둘째는 중매결혼을 하고, 셋째는 자살을 선택해. 영화의 마지막에 막내 릴리의 제안으로 넷째와 다섯째는 자유를 찾아 이스탄불로 떠나. 릴리가 야생마로 자라기에는 험난한 여정이 남아 있겠지만 스스로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나던 릴리의 눈빛에서 희망을 찾고 싶었단다.
천진난만한 릴리의 모습은 엄마의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했어. 엄마 역시 다분히 야생마의 기질을 가졌고, 그 때문에 어릴 때 광에 갇히기도 했거든. 초등학교 3학년 때쯤이었을 거야. 엄마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이웃 학교의 친구들이 집단 전학을 왔어. 늘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그 친구들과 친해졌고, 급기야 어느 봄의 토요일에 그 친구들의 동네로 놀러 가게 되었단다.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집에 알리지 못한 거지.
친구의 동네는 정말 흥미로운 곳이었어. 엄마 동네와는 달리 그곳은 두메산골이었거든. 좁은 시골길과 돼지우리, 마구간, 닭장, 집집마다 텃밭이 딸려 있는 그곳이 정말 좋았단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친구 집에서 놀던 엄마는 밤이 늦었으니 자고 가라는 친구 엄마의 말에 집 걱정 따위는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어. 밤새 그 동네 친구들과 무리 지어 놀고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집으로 갔지.
그 사이에 집에서는 난리가 났었어. 학교로 간 아이가 돌아오지 않으니 부모님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도대체 연락할 곳이라고는 없어서 뜬 눈으로 밤을 새웠던 거야. 집으로 돌아온 엄마를 외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광에 가두었어. 벌을 내린 거지. 그런데 어린 나는 반성의 마음을 갖지 못했어.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어. 그렇게 신나고 재미있는 일을 왜 못하게 하는지. 그 후로도 엄마는 여러 번 친구 집에 서 자고 왔고, 그때마다 광에 갇혔어. 그게 모두 초등학생 때의 일이야.
중학생이 되어서는 산골 마을에 사는 친구와 가까워졌는데, 결국 외할아버지는 일 년에 두 번, 그 친구 집에서 자고 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으로 엄마와 타협을 했어. 중학교 3년 내내 봄가을, 친구 집에서 자고 온 추억을 잊을 수가 없단다. 외할아버지는 억센 엄마를 길들이려고 무척 노력했지만 엄마는 외할아버지 손에 잡히질 않았어. 엄마가 여행을 좋아하게 된 것이 어쩌면 그때부터였을 지도 모르겠구나.
삶에서 소중한 것이 많겠지만 무엇보다 지켜야 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해. 우리는 자신의 타고난 기질, 꿈 등을 지켜가며 살 수 있도록 모두를 응원해야 하지 않을까? 산들이 네가 여행을 떠난 것도, 학과를 변경하려는 것도 너만의 야생마 기질을 살려가기 위해서지 않을까 싶다.
산들아. 엄마는 언제나 너만의 야생마 기질을 응원하고 싶어. 그 길이 쉽지만은 아닐 거야. 때로는 지금 네 발에 잡히는 물집처럼 네 삶에 생채기가 날 때도 있을 거고, 아픔도 이겨내야 할 거야. 그래도 네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보렴.
힘내라. 산들.